9/25/13

아버지의 긍휼

"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103:23)

오늘 아침 아버지가 자식을 불쌍히 여긴다는 표현이 마음에 다가온다. 단지 불쌍한 걸인을 동정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여기엔 아버지의 가득한 애정이 묻어나 있다.

낯선 타인에게 어쩌다 한번 베푸는 선심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자식을 돌보며 바라보는 아버지의 따뜻한 눈길이 있다.

아버지는 아들의 체질을 안다. "그가 우리 체질을 아시며.."(14절).

자식이 무엇에 약하며 어떤 것에 자주 쓰러지는지 그는 이해하고 계신다. 우리 마음 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과 고뇌를 그는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원망과 투정도 넓으신 마음으로 받아주신다. 우리의 제한된 시각으로 인하여 스스로 상처받고 스스로 오해하고 스스로 낙심에 빠져있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눈으로 바라보신다.

우리의 현재는 이 하나님의 넉넉함에 기초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넉넉한 긍휼을 배워가야 한다.

9/23/13

다음 세대를 위하여

"나의 하나님이여, 이 몸을 중도에서 데려가지 마소서"(시102:24)

시편 102편에서 시인은 포로민들이 해방되는 새 날을 꿈꾸며 노래한다. 그것은 마치 사형수가 갑작스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 같을 것이며(20절), 온 민족들이 시온에 모여 축제하는 날이 될 것이라 노래한다(21-22절). 시인은 그 날이 임박헸음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13절)

그러나 정작 시인 자신은 그 축제에 참여치 못할 것 같은 몸의 쇠약함을 한탄하며 자신을 중도에 데려가지 마시기를 구한다(23-24절). 그가 꼭 보고싶은 하나님의 영광, 여호와의 새날이 있었다. 우리는 그날을 부흥의 날이라 부른다. 우리는 그 날을 꼭 보고 싶지만 우리 생애에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지 확신이 들지는 않는다. "우리를 중도에 데려가지 마소서" 기도할 뿐이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영원성에 주목한다. 모든 것이 변하고 쇠하지만 주님은 영존하시기에(25-27절) 내가 보지못하더라도 다음 세대들은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의 종들의 자손은 항상 안전히 거주하고 그의 후손은 주 앞에 굳게 서리이다 하였도다"(28절).

우리가 꿈꾸는 바가 우리 세대에 다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아닌 다음 세대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게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누군가는 그 날을 사모하고 그날을 꿈꾸고 그 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9/22/13

바벨론 유수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단1:8)

최근 흥미로운 책 하나를 읽었다. 마이클 프로스트의 '위험한 교회'란 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대교회의 상황은 바벨론 유수기와 흡사하다 했다. 바벨론 유수기의 유대인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유대인의 명목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대인의 진짜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되어 후일 귀환의 기회가 왔을 때 소수의 사람들만 제외하고 그대로 유수의 땅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게 된다.

유대인의 바벨론 유수처럼 오늘의 교회는 세상에 유수된 존재처럼 되었다. 세속화된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교회의 교회된 정체성을 잃어버린 경우들을 보게된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유수기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들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에게 다니엘의 결심이 필요하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고 그대로 살아갔다. 주변을 불편하게 하는 일이고 자신에겐 위험한 일이었지만, 우리들에게는 이 불편한 결심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정해야할 뜻이 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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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13

누구를 가까이할 것인가?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시101:6)

시편 101편은 다윗이 왕으로 즉위할 때에 부른 시로 보여진다. 믿음이 깊었던 다윗은 그의 통치 역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되길 원했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2절).

그런데 이 완전함의 추구는 개인적인 영성 뿐 아니라 그의 인사정책에서도 나타나야 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할 뿐 아니라 나라를 인도하는 선한 목자였기 때문에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를 세우는가는 중요한 문제였다.

다윗의 인사정책의 우선순위는 한마디로 도덕적 integrity 였다. 남을 험담하는 사람, 거만한 사람, 남을 속이는 자를 세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인티그리티는 아주 작은 일에 있어서도 완전함(순전함)을 보이는 것이다. 뒤에서 은근히 누군가를 깍아내리는 일, 사람을 교만스레 대하는 일, 거짓말 하는 것, 어찌 보면 작은 일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그 작은 일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가 그의 인격과 도덕적 품성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내가 어떤 사람들을 정말 귀중하게 보아야하는가 하는 점을 보여준다. 세상에 실력있는 사람들, 탁월한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우리가 소중히 여겨할 사람은 이런 도덕적 품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이 시대에 정말 그리운 리더십은 이런 인티그리티를 보여주는 리더들이다.

9/17/13

예고편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시98:3)

시편 98편은 우리의 경험이 하나의 예고편과 같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이 시는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1절)과 사랑(3절)을 노래한다. 출애굽을 염두에 두었다 하기도 하고 바벨론포로에서 돌아온 일을 노래했다 하기도 한다. 여하튼 이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 이것이 이들이 노래해야할 이유다.

그런데 이 하나님 경험이 이들에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구원을 온 세상이 목격하게 되었다.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 이어서 온 세상(4절) 뿐 아니라 바다와 산들과 온 땅(7-8절) 까지도 이 찬양의 컨서트에 참여하라 한다. 이들로 함성을 지르라 하고 수금을 타며 나팔을 불라 하고 손뼉을 치라한다.

왜 온 세계와 만물들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찬양해야 하는가? 이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의 예고편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역사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이제 온 세상에 나타내시고, 온 우주만물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을 온 세상이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절) 이제 온 세상이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를 경험하게 될 것이며 세상의 불의가 치유되고 피조물의 탄식이 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경험은 누군가의 예고편이다.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은 내게 베푸셨던 사랑과 진실과 성실과 능력을 그대로 다른 누군가에게 행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구속사의 의미에서 하나의 연주회와 같다. 세상은 우리를 지켜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자리에 동참하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삶은 세상의 예고편이요,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9/16/13

통치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97:1)

세상엔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들이 많다. 감당하기 어려운 큰 문제들, 세상의 큰 이슈들, 거대한 조직들, 뛰어난 사람들,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 이런 것들을 대하면 작아지는 자신을 만난다.

기도와 찬양이 중요한 것은 이것들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 땅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대적을 불사르시고"(2절) 산들과 땅들을 녹이시고(5절), 모든 신들 위에 계신 지존하신 분이시다(9절).

지속적으로 그분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위축될 수 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의와 공평으로 통치하시는 그분을 보지 못하면 우리를 압박하는 불의에 그저 순응하며 살게 된다.

통치하시는 하나님(1절), 의와 공평을 보좌의 기초로 삼으신 하나님(2절), 온 땅위에 지존하신 하나님(9절)을 바라볼 때 세상에서의 당당함을 가지게 되며, 의로운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게 된다.

세상만 바라보면 세상에 압도될 수 밖에 없다. 예배는 이 세상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9/13/13

날마다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시96:2)

하나님은 날마다 찬양받으실 분이시다. 그분은 주일의 하나님이 아닌 매일의 하나님이시다. 매일 말씀과 기도 뿐 아니라 찬양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의 찬양의 샘이 말라버리지 않기 위해선 매일 그 샘터에서 찬양의 우물물을 길어내야 한다. 나를 돌아보니 그 찬양이 너무 메말라있다.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9/12/13

손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시95:7)

시편 95편에서 크고 부드러운 손을 가지신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의 손은 그의 능력을 나타낸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4절),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5절). 하나님의 손은 창조의 손이며 능력의 손이다. 모든 것이 그의 손에서 가능하고 모든 것이 그의 손 안에 있다.

동시에 하나님은 부드러운 손을 가지셨다.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7절)는 표현은 우리를 돌보는 자상하고 섬세한 그의 손길을 연상시킨다. 부드럽게 우리를 어루만지시며 돌보시는 손이다.

헨리 나우웬은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그림을 깊이 감상한 후에 아들을 감싸는 아버지의 손을 주목했다. 한 손은 남성적인 손이고 한 손은 여성적인 손이다. 아들을 붙드는 손은 힘있는 아버지의 손인 동시에 돌아온 아들을 사랑으로 감싸는 어머니의 손이었음을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손은 박목월 시인의 시제처럼 "크고 부드러운 손"이다.

9/07/13

안식일에 부르는 노래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시92:14)

시편 92편의 표제는 안식일에 부르는 노래다. 그런데 이 시를 읽어보면 안식일에 관한 내용은 없다. 유대인들의 전승은 성전예배시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왜 안식일 예배에 이 시를 골랐을까?

이 시를 읽어보면 뚜렷하게 악인과 의인을 구분한다. 악인을 풀로, 의인을 종려나무와 백향목으로 비유한다. 풀은 갑자기 온 사방에 퍼지는 것 처럼 보이나 중동의 태양아래 쉽게 말라버린다. 그래서 성경에서 풀은 종종 인생의 무상함이나, 악인의 결말을 이야기할 때 "풀과 같다"는 표현을 쓴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풀처럼 번성하는 악인들을 자주본다. 시편 37편에서도 이것이 시편기자의 고민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들을 보노라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신앙의 양심을 지켜가는 것이 무의미하게 보인다.

그러나 예배의 자리에 와서 시인은 이들의 번성함이 풀과 같은 것임을 깨닫고 노래한다. 그들이 세상을 주도해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정오의 태양이 비치면 이 풀들은 스러지고 말라져 버린다.

반면 의인들은 여호의 뜰에 심기운 종려나무, 백향목 같은 나무라 한다. 이들은 늙어도 결실을 맺고, 그 잎사귀의 청청함과 푸르름이 계속될 것이라 한다.

이들이 이렇게 결실을 맺으며 청청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밀은 여호의 뜰에 심겨졌기 때문이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13절).

시편 1편의 계절마다 열매를 맺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요15장의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처럼, 하나님을 근원으로 삼는 인생은 푸르르다. 하나님의 뜰 안에서 높이 성장하여 담장 바깥의 말라져가는 풀들을 바라보게 되듯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나가는 인생의 궁극적 승리가 있다.

구약의 성도들은 안식일에 이 노래를 부르며 이것을 기억하지 않았을까?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만이 영원한 진실이요 승리가 될 것임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세상에서 비진리가 득세하고 악인이 번성해도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승리할 것이고, 그 나라가 영원히 설 것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리고 의인들의 궁극적 승리를 믿으며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9/05/13

실제적 믿음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91:11-12)

유대 랍비들의 전승을 따르면 시편 91편은 광야를 지날 때 부른 모세의 시라고 한다.

광야에는 많은 위험이 있다. 이 시에는 화살(적으로 부터의 공격)과 전염병, 사자와 독사(코브라) 등의 위험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호처로 삼고 그를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위험이 임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신다는 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이 시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아주 개운하지만은 않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이 말씀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것 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보호를 약속하셨지만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이들에게도 사고나 질병이 임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뿐만 아니라 천사를 보내 보호하겠다는 이 말씀은 사단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유혹하면서 사용했던 구절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뛰어내리지 않으셨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시험이 된다. 이런 하나님이 약속이 있는데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 상황들이 많다.

이 곤란함을 피해가는 쉬운 해결책은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영적인 보호라고 믿으면 쉽게 풀려질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 우리는 믿음을 실제영역을 제외한 특정영역에서만 구사하게된다.그러나 이 시는 광야에서의 실제적 위험들과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노래이다.

한번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시던 중 주무셨고, 그 사이 바다의 폭풍우가 불어 제자들은 패닉상태에 빠져 예수님을 깨웠다. 이 때 예수님은 바람을 잠재우시면서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왜 의심하였는가?" 꾸짖으셨다. 제자들을 꾸짖으신 것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보호해주실 것을 왜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실제적인 믿음이었다.

나는 삶에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리지 못할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내게는 실제적인 믿음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 작은 배에 일어나는 작은 바람에도 곧 패닉상태에 빠져버리는 내게 주님은 동일한 말씀을 하실 것 같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는가?"

9/03/13

인생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시90:13)

시편 90편의 저자는 모세로 알려져왔다. 어느 시점일까? 출애굽전? 홍해바다 건넌후 직후? 광야 초기? 혹은 후기? 의견들이 분분하다. 오히려 시편90편을 읽고 시기를 가늠해보면 답이 있지 않을까?

이 시를 보면 먼지로 돌아가는 사람들, 아침에 피어난 여린 풀이 작렬하는 태양 앞에 말라버리듯, 거대한 홍수가 휩쓸어가듯 죽어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던 것 같다. 고생과 슬픔을 함께 해온 이들, 오래 살아야 칠십 팔십이 되는 인생도 다 하기전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로 죽어갔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분노에 할 말이 없다.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죄악으로 하나님을 분노케 하여 그 맹렬한 진노하심 속에 사람들은 죽어갔던 것이다. 사람들의 일생이 하나님의 분노 중에 다 흘러가는 것만 같다.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미련하여 그 짧은 날들을 살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올 줄 모른다.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공동번역).

시편기자가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이것이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 이 짧은 인생을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시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13절) 이다.

그리하여 남은 인생이 하나님의 인자하심(14절), 하나님의 기쁨(15절), 주의 영광(16절), 하나님의 은총(17절) 속에 살게 되기를 기도한다.

이 시는 광야에서 사람들이 수 없이 하나님을 분노케 하여 죽어가고 40년을 배회하던 중에 쓰여진 시가 아닐까? 함께 고생하며 걸어온 사람들이 죽어가고 그 자리에 광야의 먼지가 휘감아 가고 끝은 아직도 보이지 않던 시기에 쓰여진 시가 아닌가 싶다. 그런 광야의 인생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기도는 이것이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