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22:16-20에서 전인적 순결을 원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적 순결을 원하신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한분만을 섬기는 영적 순결을 원하신다. 우리는 영화와 예술과 문학과 정치와 사회와 사람들의 행습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서 최종적인 인생의 가치관을 배운다.
3/31/11
3/29/11
3/28/11
보상 3월 28, 2011
출20:22-36의 QT 말씀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나 다음 몇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보상까지 포함한다. 우리 힘으로 보상할 수 없는 영역들은 주님께 맡겨야겠지만, 우리가 보상할 수 있는 내용은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
둘째, 피해를 준 사람들도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동해보복법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살벌하지만, 원래의 취지는 피해자가 몇배로 보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제동을 걸어준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우리가 마음대로 원한과 분노를 쏟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것이 무슨 행동을 해도 좋다는 면죄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해자 역시 보호의 대상이다.
셋째,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면 율법의 기준을 훨씬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삭개오는 회개하였을 때, 피해를 준 것의 4배나 값겠다고 자원하여 고백한다. 이것이 성령이 가져오는 인간변화다. 율법이 표준을 보여준다면 은혜는 그 표준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때때로 율법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준다.
첫째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을 경우,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회개는 보상까지 포함한다. 우리 힘으로 보상할 수 없는 영역들은 주님께 맡겨야겠지만, 우리가 보상할 수 있는 내용은 반드시 보상해야 한다.
둘째, 피해를 준 사람들도 역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의 동해보복법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살벌하지만, 원래의 취지는 피해자가 몇배로 보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에 제동을 걸어준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우리가 마음대로 원한과 분노를 쏟아낼 수는 없는 것이다. 때로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것이 무슨 행동을 해도 좋다는 면죄부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가해자 역시 보호의 대상이다.
셋째,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되면 율법의 기준을 훨씬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삭개오는 회개하였을 때, 피해를 준 것의 4배나 값겠다고 자원하여 고백한다. 이것이 성령이 가져오는 인간변화다. 율법이 표준을 보여준다면 은혜는 그 표준을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줄 뿐 아니라, 때때로 율법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준다.
3/25/11
진정 우리의 VIP가 되어야할 사람들은? 3월 25, 2011
신앙인이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하는 한가지는 VIP가 아닌 사람들에 대한 태도이다. 각자에겐 마음의 VIP가 있고, VIP에 대해선 누구를 막론하고 잘대해준다.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그러나 신앙는 소자와 약자와 하찮아 보이는 이들을 VIP 보다 더한 예수님처럼 대해주는 것이다. 출애굽기 21:1-11절이 종들에 대한 하나님의 율법은 종들에게 매칠년마다 자유의 기회를 주시는 말씀이다. 다른 어느 세계에서도 발견할 수 없는 은혜의 조항이다. 누군가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 고아와 과부들, 병든 자들에게 "거룩한 편애"가 있으시다고 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름 마음 속으로 사람들에게 중요도의 라벨을 붙여놓고 대하는 처신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예수님은 내 모든 라벨을 바꿔달고 싶어하실지 모르겠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름 마음 속으로 사람들에게 중요도의 라벨을 붙여놓고 대하는 처신을 달리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쩌면 예수님은 내 모든 라벨을 바꿔달고 싶어하실지 모르겠다.
3/23/11
십계명은 경계선을 치는 것 3월 23, 2011
십계명은 경계선을 치는 것이기도 하다.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가 절대 넘어가서는 안되는 경계선들이 있다. 오늘의 출20:15-17의 8,9,10 계명은 이웃의 재산과 명예의 경계선, 이웃의 사람과 소유를 절대 탐하지 말아야할 경계선들을 보여준다. 다른 계명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첫자리, 부모의 권위, 사람의 생명, 부부의 성 모두 우리가 지켜야할 경계선들이다.
종종 경계선 장애를 가진 이들을 만난다. 자신이 지켜야할 경계선의 혼란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부부가 꼭 지켜야하고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관계의 경계선들이 있는데 그 경계선을 모호하게 함으로 부부갈등을 증폭시키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경계선들이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 가정, 인격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가 무너진다. 하나님이 이런 경계선을 주신 이유는 이런 경계선이 우리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테니스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다. 선수들은 항상 자신 뿐 아니라 상대편의 라인을 계속 의식하며 공을 주고 받는다. 심판이 혹이라도 잘못 판정한 것 같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라인 밖인지 안인지를 확인한다. 그렇게 라인 안에서 공을 주고 받는 것이 테니스의 법칙이듯이 하나님이 설정해주신 경계선들을 늘 의식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종종 경계선 장애를 가진 이들을 만난다. 자신이 지켜야할 경계선의 혼란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부부가 꼭 지켜야하고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관계의 경계선들이 있는데 그 경계선을 모호하게 함으로 부부갈등을 증폭시키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경계선들이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 가정, 인격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가 무너진다. 하나님이 이런 경계선을 주신 이유는 이런 경계선이 우리를 보호해주기 때문이다.
테니스 경기를 관람한 적이 있다. 선수들은 항상 자신 뿐 아니라 상대편의 라인을 계속 의식하며 공을 주고 받는다. 심판이 혹이라도 잘못 판정한 것 같으면 이의를 제기하고 라인 밖인지 안인지를 확인한다. 그렇게 라인 안에서 공을 주고 받는 것이 테니스의 법칙이듯이 하나님이 설정해주신 경계선들을 늘 의식하면서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법칙이다.
3/22/11
십계명은 반문화적으로 살라는 명령 3월 22, 2011
십계명을 보면 우리의 문화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서 반항적인 문화임을 알 수 있다. 오늘의 본문 출20:12-14의 십계명의 5,6,7계명을 보면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할 가치들을 볼 수 있다. 부모, 생명, 성은 소중히 여기고, 지켜야 할 가치들이다.그러나 오늘의 문화는 이런 가치를 무시하고 경시하는 문화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 반문화적으로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의 세상이 하나님의 뜻인 부모, 생명, 성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가볍게 여기는 동안 우리들은 이런 문화에 반하여 이런 가치를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할 최고의 가치들로 격상하며 살기 때문이다.
3/21/11
안식한다는 의미 3월 21, 201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임을 출애굽기 20:7-12의 십계명의 제 3-4계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한가지 싸인은 안식하는 것이다.십일조를 통해 모든 물질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듯이,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공급자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일주일 중 하루의 안식은 끊임없이 생존의 필요와 탐욕으로 나가려고 하는 우리의 발걸음에 제동을 걸어준다. 하루의 공백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동시에 일주일을 주님께 드리며 주님께서 삶의 인도자임으로 고백하고 주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을 드리는 것이다.
3/18/11
예배의 자리 3월 18, 2011
출 19:17-25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신중해야하는가를 보여준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그 장면은 연기와 불과 진동과 나팔소리가 가득한 위엄찬 곳이었다. 산에 경계를 정하고 백성들을 차단했다. 백성들은 자신을 성결히 해야했다. 이미 모세는 이러한 지시를 받고 산에 올랐음에도 하나님은 다시 한번 백성들을 주의시키도록 내려보낸다. 산정상에서 다시 내려와 하나님의 지시를 전하고 다시 산정상까지 올라야 했다.
이것은 불편하고 불필요한 지시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만큼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함을 반증해 준다. 하나님을 우리가 예배를 신중히, 경건한 두려움으로 드리기를 원하신다. 예배의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의 필요나 편의, 혹은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바른 태도이다. 왜냐하면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때문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이것은 불편하고 불필요한 지시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만큼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중요함을 반증해 준다. 하나님을 우리가 예배를 신중히, 경건한 두려움으로 드리기를 원하신다. 예배의 중요한 질문은 사람들의 필요나 편의, 혹은 기호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바른 태도이다. 왜냐하면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때문이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3/17/11
억측의 죄 에돔의 죄 3월 17, 2011
일본 땅에 상상을 초월한 비극이 찾아왔다. 많은 이들이 이 비극에 기도로, 후원으로 동참하고 심지어 반일단체, 독도지킴이 등도 이에 동참하고 있는 가운데 몇몇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 비극이 예수 잘 믿지 않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하여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이런 재난의 현장에서 우리는 두가지 죄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나는 욥의 고난에 대해 보이는 친구들의 보인 억측의 죄이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욥의 숨겨진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했지만, 욥기 후반부에서는 오히려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는 대목을 접할 수 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우리의 몇가지 기준으로 쉽게 단정하는 억측의 죄를 우리는 종종 범한다.
두번째는 에돔의 죄이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로서 이스라엘의 형제 민족으로 설명되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공격과 고난을 받는 날에 에돔은 방관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하나님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이 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옵 1:10-12)
하나는 욥의 고난에 대해 보이는 친구들의 보인 억측의 죄이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욥의 숨겨진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규정했지만, 욥기 후반부에서는 오히려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시는 대목을 접할 수 있다.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우리의 몇가지 기준으로 쉽게 단정하는 억측의 죄를 우리는 종종 범한다.
두번째는 에돔의 죄이다. 에돔은 에서의 후예로서 이스라엘의 형제 민족으로 설명되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공격과 고난을 받는 날에 에돔은 방관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를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하나님은 남의 불행을 기뻐하는 이 죄를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으로 말미암아 부끄러움을 당하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빼앗아 가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이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며...”(옵 1:10-12)
하나님과의 만남의 조건 3월 17, 2011
출19:7-16절 오늘의 QT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성결이 요구됨을 말씀하신다. 옷을 빨고 여인을 가까이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할 것을 말씀하신다. 시내산에는 모세 한 사람이 올라가지만, 모든 백성이 자신들을 성별히 하며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였다.
우리가 사는 곳은 시내산이 아니라 세속 사회이지만,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의복을 빨고 몸을 씻는 것이 아니라 매일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의 피로 우리를 깨끗이 할 때 매일 하나님과의 만남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신다.
우리가 사는 곳은 시내산이 아니라 세속 사회이지만,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이제 의복을 빨고 몸을 씻는 것이 아니라 매일 십자가 앞에 나아가 주의 피로 우리를 깨끗이 할 때 매일 하나님과의 만남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신다.
3/15/11
경청의 지혜 3월 15, 2011
오늘의 본문 출18:19절 이하 말씀은 모세가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여 백성을 분담해서 보살피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모세가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세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자였다. 자존심을 내세울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엄밀히 말해 이드로는 이방의 제사장이었다. 신앙 공동체이기도 했던 이스라엘의 내부적 문제의 일에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세는 그의 말을 따랐다.
지혜자는 경청할 줄 아는자요, 누구에게든지 배울 수도 있는 사람이다. 잠언은 미련한 자는 충고하는 자를 미워하고 지혜자는 그를 기뻐한다 하였다.
그런데 모세가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세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의 대표자였다. 자존심을 내세울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엄밀히 말해 이드로는 이방의 제사장이었다. 신앙 공동체이기도 했던 이스라엘의 내부적 문제의 일에 이드로의 충고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모세는 그의 말을 따랐다.
지혜자는 경청할 줄 아는자요, 누구에게든지 배울 수도 있는 사람이다. 잠언은 미련한 자는 충고하는 자를 미워하고 지혜자는 그를 기뻐한다 하였다.
3/14/11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 3월 14, 2011
좋은 리더십은 함께할 줄 아는 리더십이다. 모세의 초기 리더십은 혼자 하는 리더십이었다. 이에 그의 장인 이드로는 "네가 혼자 할 수 없으리라"(출18:18)고 충고하고, 사람들을 세울 것을 충고한다. 이것이 모세가 위대한 지도자로 새롭게 출발하게 되는 지점이라고 믿는다. 교회 안에서 좋은 봉사자는 맡은 일을 혼자 하려고 끙끙거리는 사람이 아니다. 맡은 일을 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과 공유하려고 애쓰는 봉사자이다. 그럼으로써 다른 지체들이 봉사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숨겨진 은사를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이 시대에 귀하게쓰임받는 교회들은 공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동역의 비밀을 개발하는 특징들을 갖는다.
3/11/11
사람을 섬기는 길은 어렵다 3월 11, 2011
출 17:1-7에서 사람들을 섬기는 길이 어렵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출애굽 당시만 해도, 홍해를 건넜을 때만 해도 필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 해방의 영웅 모세를 칭송하거나 감사의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라를 지나 신광야를 지나 오늘의 르비딤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반응은 계속 원망하고 불평한다. 오늘 본문은 그들이 모세와 다투었다고 했는데 매우 심한 말들을 쏟아부은 것 같다.
이민목회를 하면서 아무래도 처음 이민 온 이들은 먼저 온 이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움을 받다가 한두가지 상황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이를 두고 계속 불평하고 이상한 소문까지 내는 경우들도 보았다. 순수하게 돕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관계까지 깨지기도 한다ㅏ.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은 100가지 은혜보다 한가지 서운한 점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오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여준 행태도 그러했다. 왜 자기들을 이끌어내서 이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느냐고 모세를 원망한다. 모세가 섬겨야할 대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섬겨야하고 품어야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의인이 아닌 죄인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민목회를 하면서 아무래도 처음 이민 온 이들은 먼저 온 이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도움을 받다가 한두가지 상황적으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경우 이를 두고 계속 불평하고 이상한 소문까지 내는 경우들도 보았다. 순수하게 돕고자 했던 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관계까지 깨지기도 한다ㅏ.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은 100가지 은혜보다 한가지 서운한 점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오늘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여준 행태도 그러했다. 왜 자기들을 이끌어내서 이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느냐고 모세를 원망한다. 모세가 섬겨야할 대상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섬겨야하고 품어야하는 사람들도 이런 사람들이다. 예수님도 의인이 아닌 죄인된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3/10/11
만나 항아리의 뜻 3월 10, 2011
출16장 25-36의 말씀에서 신앙생활 가운데 기억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광야 40년 동안 내려졌던 만나의 축복을 기억하도록 만나를 항아리에 넣어 증거궤 앞에 둘 것을 명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출애굽의 은혜를 유월절로, 요단강을 건넌 은혜를 열두개의 돌로, 십자가의 은혜를 주의 만찬으로, 만나의 은혜를 만나 항아리로 기억하게 하셨다. 또한 이 만나 항아리를 후일 언약궤가 될 증거판 앞에놓도록 하여 만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사안인지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체험한 많은 은혜들이 있다. 인생의 여정에 기적적으로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손길들이 있다.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의 상징물을 많이 사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영성훈련을 많이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징물이 우상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망각의 존재인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나게 하는 상징물들을 곁에 배치해 두는 것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유명한 "만종"의 그림처럼 어느 시간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알람)에 모든 것을 잠시 잊고 우리의 일상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의 시간으로 삼을 수도 있고, 어떤 노래, 어떤 성경구절이나 그림들을 주변에 배치해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목사님은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는 그림을 자기 방에 걸어넣고 그 밑에다 "하나님의 썰물은 반드시 다시 온다"는 글귀를 적어놓았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욥 36:24)
마찬가지로 개인적으로 체험한 많은 은혜들이 있다. 인생의 여정에 기적적으로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손길들이 있다. 신앙의 선배들은 신앙의 상징물을 많이 사용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영성훈련을 많이 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상징물이 우상처럼 여겨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망각의 존재인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나게 하는 상징물들을 곁에 배치해 두는 것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유명한 "만종"의 그림처럼 어느 시간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알람)에 모든 것을 잠시 잊고 우리의 일상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의 시간으로 삼을 수도 있고, 어떤 노래, 어떤 성경구절이나 그림들을 주변에 배치해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목사님은 썰물과 밀물이 교차하는 그림을 자기 방에 걸어넣고 그 밑에다 "하나님의 썰물은 반드시 다시 온다"는 글귀를 적어놓았다는 글을 읽은 적도 있다.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욥 36:24)
3/09/11
먹을 만큼만 3월 09, 2011
오늘의 QT본문 출16:19-24에서 하나님은 그날 먹을만큼의 만나만 거둬들이라고 하신다. 더 거둬들여봤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다. 안식일에만 예외로 이틀치의 만나를 거둬들일 수 있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매일의 먹을 만큼의 만나만 거둬들이도록 하신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거둬들인 만나가 광야길의 짐이 되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람들은 짐이 되도록 물질을 탐하는 폐단을 가지고 있다. 광야길의 불안감이 큰 요인일 것이다. 그래서 매일치의 만나만 거둬들이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내일 또 만나를 내려 주실 것을 믿고 오늘치만 거둬들이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광야길에 쓸데없이 어리석은 짐만 지고 가게된다. 그런데 우리들도 오늘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염려와 걱정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것은 거둬들인 만나가 광야길의 짐이 되게하지 않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사람들은 짐이 되도록 물질을 탐하는 폐단을 가지고 있다. 광야길의 불안감이 큰 요인일 것이다. 그래서 매일치의 만나만 거둬들이는 것은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내일 또 만나를 내려 주실 것을 믿고 오늘치만 거둬들이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광야길에 쓸데없이 어리석은 짐만 지고 가게된다. 그런데 우리들도 오늘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염려와 걱정의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3/08/11
믿음이 필요한 때 3월 08, 2011
출애굽기 16:6-18의 오늘 QT 본문은 길이 막막할 때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할 때임을 가르친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유치원생 대하듯이 앞에 있을 일을 세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불친절로 비쳐진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어떻게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하나님의 설명을 듣지 못한채 광야에 던져졌다. 하나님이 우리와 맺고 싶어하시는 관계는 신뢰의 관계이다. 앞이 캄캄하고 막막해 보이는 그 환경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원망하는 경우가 많다. 앞이 캄캄한 인생의 광야는 믿음의 훈련장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세세히 미리 설명하시지 않는다. 다만 시간과 미래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기를 원하신다. 광야에서 그들이 배워야했던 교훈이고 오늘 내가 배워야하는 교훈이다.
종종 인생을 살다가도, 목회를 하는 입장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순간들이 있다. 바로 이때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때이다.“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하나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세세히 미리 설명하시지 않는다. 다만 시간과 미래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가기를 원하신다. 광야에서 그들이 배워야했던 교훈이고 오늘 내가 배워야하는 교훈이다.
종종 인생을 살다가도, 목회를 하는 입장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순간들이 있다. 바로 이때가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때이다.“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3/07/11
교제의 기초 3월 07, 2011
우리는 출애굽기의 "바로"와 같은 인물에게서 우리 안의 인간의 완고함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느낀다. 동시에 홍해를 건너자 마자 줄곧 불평하고 원망해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도 역시 상황에 따라 돌변하는 죄인된 인간된 우리를 발견한다. 바로가 "저들"이라면 이스라엘은 "우리"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의 출애굽기 16:1-5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곧바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는 이들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고, 교회 안에서 만나는 믿음 좋은 이들일 수 있다. 이들은 출애굽기 15장의 홍해를 건넌 직후 찬양을 드리던 이들이고, 곧 이어 광야길에 들어서자마자 물때문에 불평하고 음식때문에 불평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그간의 교회생활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 "돌변" 때문에 곤혹스러워한적이 많이 있었다. 평소에 존경하기까지 했던 신앙인들이 어느 상황에서는 폭도처럼 변하는 것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죄인됨을 내 안에서도 발견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나누는 교제는 허상의 교제가 아니다. 나 자신이나 내 교제의 대상들은 이런 돌변성을 가진 인간들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 기적때문에 열광하며 따르는 이들에 대해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2:24)라고 한다.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그 죄인됨을 알고도 그들을 끌어안고 가야하는 대상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상대방의 죄인됨을 알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서로를 용납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그간의 교회생활을 통해서 사람들의 이 "돌변" 때문에 곤혹스러워한적이 많이 있었다. 평소에 존경하기까지 했던 신앙인들이 어느 상황에서는 폭도처럼 변하는 것도 목격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죄인됨을 내 안에서도 발견한다. 우리가 교회에서 나누는 교제는 허상의 교제가 아니다. 나 자신이나 내 교제의 대상들은 이런 돌변성을 가진 인간들이다.
요한복음 2장에서 기적때문에 열광하며 따르는 이들에 대해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요2:24)라고 한다. 사람들은 의지할 대상이 아니다. 다만 그 죄인됨을 알고도 그들을 끌어안고 가야하는 대상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자신의 죄인됨을 알고, 상대방의 죄인됨을 알고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하며 서로를 용납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일 것이다.
3/04/11
찬양의 능력 3월 04, 2011
출15:11-21말씀에서 찬양의 능력을 보게 된다. 출15장은 홍해를 건넌 후의 모세의 노래다. 전반부에서는 추격하던 애굽군대를 수장시킨 하나님의 능력을 주로 노래한다. 그러나 오늘 본문인 11절부터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고, 주변국들의 장애를 넘어서게 하실 것에 대한 확신의 노래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 가나안까지 인도해주실 것에 대하여 찬양한다. 이것이 찬양의 능력이 될 것이다. 우리의 과거나 현재의 일에 대한 찬양과 감사는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갖게 해준다. 홍해사건에 대한 감사와 찬양은 가나안 정착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졌다.
우리 생활 속에서 찬양과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더해준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보다는 이미 베푸신 은혜에 대한 묵상과 감사는 불안스런 미래까지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오늘은 찬양을 많이 들어야겠다.
우리 생활 속에서 찬양과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과 확신을 더해준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염려보다는 이미 베푸신 은혜에 대한 묵상과 감사는 불안스런 미래까지도 믿음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오늘은 찬양을 많이 들어야겠다.
3/03/11
나의 하나님 3월 03, 2011
출15:1-10에서 모세는 큰 능력으로 홍해를 가르며 애굽군대의손에서 구출해 내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되셨다고 고백하며 찬양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시편기자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라"(시23:1)고 찬양한다.
인생 끝까지'나의'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생에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배신과 실망과 상처의 얼룩이 있다. 단한가지 예외. 하나님은 끝까지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사실, 우리가 노래할 이유이다.
인생 끝까지'나의'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인생에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배신과 실망과 상처의 얼룩이 있다. 단한가지 예외. 하나님은 끝까지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는 사실, 우리가 노래할 이유이다.
3/02/11
인간이 손을 따라 움직이시는 하나님 3월 02, 2011
출14:21-31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의 손을 따라 움직이신 것 처럼 보인다. 모세가 손을 들자 하나님께서 동풍을 일으켜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다시 손을 드니까 갈라졌던 홍해물이 다시 합해지게 하셨다. 마치 모세가 지휘자같고 하나님이 연주자같다.인간의 도움 없이도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왜 모세의 손을 기다리셨던 것일까? 그것은 당신의 일에 인간을 동참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라고 생각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따라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마7:7-8). 기도는 기적의 주문은 아니다. 다만 인간과 상관없이도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기다려 그 기도를 통해 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기도로 동참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전도 역시 마찬가지.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권적으로 구하시려 하는 사람을 구하실 수 있으시다. 그런데 인간의 전도의 수고를 통해서 사람들을 추수하기를 원하신다. 이것 역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동참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이다.
우리는 모세의 손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무엇인가 일하시고자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기도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실 뿐 아니라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따라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마7:7-8). 기도는 기적의 주문은 아니다. 다만 인간과 상관없이도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를 기다려 그 기도를 통해 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 기도로 동참하는 기쁨을 맛보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전도 역시 마찬가지. 하나님은 얼마든지 주권적으로 구하시려 하는 사람을 구하실 수 있으시다. 그런데 인간의 전도의 수고를 통해서 사람들을 추수하기를 원하신다. 이것 역시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동참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이다.
우리는 모세의 손을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우리를 통해 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무엇인가 일하시고자 하신다.
3/01/11
하나님이 기도를 그만하라하신다 3월 01, 2011
하나님이 기도를 그만하라하신다. 출14:15-20을 보면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15절)고 물으신다. 기도를 그만하라하시는 것이다. 나는 내 기도가 충분하다고 느낀 적이 별로없다. 기도에 대해서는 늘 부족감, 죄스러움 같은 것이 있다. 아무리 기도를 많이해도 우리가 주변의 '기도의 사람들'이나 교회사 상의 위인들을 쫒아갈 수 있을 것 같지않다. 하나님은 늘 기도를 더 요구하실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도를 그만하라하신다. 언제 기도를 중단해야할까? 우리가 기도를 해서 이미 명확한 대답을 들었을 때일 것이다. 내가 기도했고 하나님이 이미 내가할 일을 보여주셨다. 이때는 일어나 순종하면된다. 그런데 불안감 때문에 계속 기도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게되는 경우다. 이럴 때 기도는 순종일까? 불순종일까? 우리 기도제목의 어떤 사안들은 기도를 중지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기도를 그만하라하신다. 언제 기도를 중단해야할까? 우리가 기도를 해서 이미 명확한 대답을 들었을 때일 것이다. 내가 기도했고 하나님이 이미 내가할 일을 보여주셨다. 이때는 일어나 순종하면된다. 그런데 불안감 때문에 계속 기도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게되는 경우다. 이럴 때 기도는 순종일까? 불순종일까? 우리 기도제목의 어떤 사안들은 기도를 중지하고 이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