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9/12

우리는 누구인가?

성경이야 말로 인간의 실상을 사실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폴 투르니에는 자기가 성경을 믿는 이유는 성경이 사실적이기 때문이라 했다. 그가 말한 '사실적'이란 의미는 사진을 찍듯이 인간의 실상을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 어느 책보다도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했다. 

신명기 27장에 나오는 저주의 목록에서도 인간이 지를 수 있는 여러가지 실상을 공개한다. 그 한 예로 21절을 보면 "짐승과 교합하는 모든 자는 저주를 받을 저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고 되어있다. 짐승과 교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자기의 어머니(친어머니가 아닐지라도), 누이동생, 장모등과의 성적 범죄를 저지를 것을 미리 경고한다.

성경이 이런 기괴한 것들을 경고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인간의 실상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어느 상황이 되면 얼마든지 짐승적인 범죄까지도 저지를 수 있는 타락한 본성이 있다. 이것은 사람을 그냥 긍정할 수 만은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로서 여전히 고귀한 존재지만, 동시에 타락된 본성이 인류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기에 하나님이 붙들어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얼마든지 끔찍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인간들은 심리적인 자기 긍정 이상의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과정에 숨어있는 인간의 죄성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죄인됨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죄인된 인간들과 그들의 공동체는 아무리 아름다운 목적으로 시작해도 결국은 파멸로 갈 수 밖에 없기에 하나님의 구원만이 인류의 출구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구원의 문이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요한복음 10:9)

9/26/12

함께 즐거워할 사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이웃과 함께 나누도록 디자인된 것이다.

신명기 26장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 수확을 주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되어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26:11)

그런데 우리의 축복을 함께 나누고 함께 즐거워할 대상은 누구인가?  경작할 땅을 분배받지 못한 레위인과 객들이다. 12절에는 여기에 고아와 과부를 더 추가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 축복을 주셨다면 그것은 나만 누리도록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 주변의 누군가는 내 축복때문에 덕보는 일이 있어야 한다. 나 때문에 아무도 덕보는 사람이 없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의 의도를 내가 무시한 것이다.

9/25/12

수치 형벌

신명기를 보면 이스라엘에 있었던 몇가지 형벌의 종류를 볼 수 있다.

 첫째는 돌 던짐 등에 의한 사형이다. 간음이나 우상숭배등의 범죄가 있을 때 이런 형벌을 받았다.

 둘째는 매를 맞는 태장이다. 매는 한번에 40대 이상을 맞을 수 없었다.

 셋째는 배상이다. 결혼한 이가 아내를 의심하여 무고하게 불명예를 입힌 경우 100세겔을 아내의 아버지에게 배상하도록 하는 등 여러가지 종류의 배상이있었다. 

넷째는 형벌로서의 결혼이다. 유부녀를 성폭행했을 경우 돌던짐으로 사형에 처했지만, 처녀를 성폭행하였을 경우 그와 결혼하고 이 여인과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다섯째, 수치 형벌이 있다. 형제중에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은 경우 동생은 형수와 결혼하여 형의 이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형제의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거부하는 경우 형수는 재판장들이 보는 앞에서 시동생의 신발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게 하였고, 그 집을 "신발 벗기운 자의 집"(The Family of the Unsandaled)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렇게 불리우는 것은 가문의 수치가 되는 일이었다. 

형제의 의무를 등한시 하는 이에게 수치형벌을 가했던 이유는 형제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믿음때문이었다. 물론 우리의 문화권에서 형수와 결혼하는 등의 형제의 의무를 고대사회와 동일하게 적용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에게는 여전히 감당해야할 형제된 의무가 있고 자녀된 의무가 있고, 제자된 의무가 있다. 그것을 소홀히 여기는 것을 수치요 불명예라고 여기는 성숙한 믿음이 필요하다.

9/23/12

그리스도인의 경제활동과 제자도

그리스도인의 경제활동에서 기억해야할 한가지가 있다. 신명기 24:21 말씀은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고 한다. 우리는 경제활동을 통해서 최대의 이윤과 소득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성경말씀대로 살고자 한다면 이것이 어려워진다. 성경은 우리가 포도나 감람나무 등에서 수확할 때 한번 수확한 후에 나머지 것들도 남김없이 최대한 다 수확하려고 하지 말고 남은 것들은 가난한 이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몫으로 돌리라고 한다. 이렇게 살자면 우리의 경제활동에서 최대이윤을 얻기는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성경은 우리가 경제활동을 통해서도 이웃을 돌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실천하기가 까다롭고 시험이 될 수 있는 고민거리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도에서 이 부분을 생략하고 넘어가기 어려운 부분이다.

9/22/12

우리가 살아가는 곳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우리의 삶의 장소는 하나님의 거룩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곳이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머무는 곳을 거룩한 장소로 만들어야 했다.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신23:14).

하나님은 물리적 장소에 제한받으실 수 없지만, 어떤 장소에는 특별한 임재를 약속하신다.  구약의 성소가 그러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장소에 그러했다.  "하나님이 너희 중에 계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언약에 핵심적 내용이다.

동일하게 임마누엘 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 이루어지는 삶이다. 주님은 친히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리라" 약속하셨고, 성령님을 통해 우리의 삶에 임재하신다.

그렇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1차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거룩이며,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영을 칠 때 가시적이고 실제적으로 불결한 것들을 멀리했던 것 같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을 제거하는 구체적인 조치들이 필요하다.


9/21/12

공동체의 정체성과 멤버십


공동체는 그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정체성이 흔들리는 사람은 성숙하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신명기 23장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1,2,3,8절).
여호와의 총회가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할 수 있지만, 이 표현은 신앙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신명기 23장에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사람들로 고자, 사생자, 모암과 암몬 자손들을 언급한다. 그중 고자나 사생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도 여호와의 총회원이 될 수 있었지만, 모압과 암몬 사람들은 여기에서 제외되었다.  이것은 신앙공동체의 정체성을 엄격하게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여호와"의 총회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멤버십에 있어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의 정체성과 멤버십 제도를 생각하게 한다. 교회는 누구나 올 수 있다. 그러나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회원권은 아무나되어서는 안된다. 현대교회의 질적 저하는 여기에 기인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우리의 교회가 신앙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 분명히 해야할 한가지는 우리의 교회 멤버십의 기준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9/20/12

무엇이든 바꾸실 수 있는 하나님

신23: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저주를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해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고후 12:9 "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약함을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우리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다.

9/19/12

개인적 거룩과 사회적 거룩

우리는 개인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 영역에서도 거룩을 추구해야 한다. 신명기 22장에서는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는 표현이 세번 나온다(21,22,24절).

하나님과의 관계는 하나님과 나의 개인적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공동체적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의 교회에서 강조하는 것은 개인적 영성에만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영혼 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공동체의 거룩에 관심이 있으시다. 그래서 잘못된 관행이나 악습이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기존에 퍼져있는 악행들을 타파하는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우리의 역량을 다해야한다.

9/18/12

난간과 경건

신22:8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집을 지을 때 난간을 짓고 안짓고는 하나님과 상관없어 보인다. 그런데 본문이 이것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과 관련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종교활동의 영역에서만 하나님을 결부시키려는 경향이 많다. 우리의 예배, 기도, 성경공부, 교회활동 등등. 그러나 집을 짓는 것은 하나님과 무관하여 보인다. 집에 난간을 만들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도 무관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의 생명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에서는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구속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한 사람들의 생명을 당신의 백성들이 소중히 여기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것은 집짓기에도 반영되어야 했다.


이것은 집짓기에만 국한 되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사업주가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근무환경이나 기업들이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는 모든 종류의 서비스와 제품에서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반영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경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난간을 만드는 것은 경건이다. 그렇다면 그 정신을 담아 우리의 일상의 현장에서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배려는 일면 하나님과 무관해 보이나 그것은 경건한 삶의 양태이다.

9/12/12

아무 것도 살려두지 말라?

신20: 16.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벌기는 현대인의 입장에서 거부감이 드는 대목들이 있다. 남의 땅에 대한 침략 자체만 생각해도 하나님의 일이라 부르기가 꺼림직할 뿐 아니라, 그 땅의 모든 생명을 살려두지 말라는 말씀도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공격하는 단골메뉴가 되었다. 이런 거부감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정체성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몇가지 우리의 생각을 정리해둘 필요가 있다.

1. 모든 땅의 소유권과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 가나안 정벌에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 중에 기존의 거주민들의 악행과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셨다는 언급들이 자주 나온다. 기존의 거주민들도 그 땅의 주인이 아니었다. 그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셨다. 그래서 주인이 그 땅의 새로운 거주민으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은 불법이 아니다.

가나안 땅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주실 수도 있고 거둬가실 수도 있는 권리가 있는 분이시다.

2. 하나님의 주권은 도덕성 위에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비도덕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도덕적 기준들로 하나님을 평가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기존의 가나안 족속들을 다 진멸하라 명령하시는 하나님이 비도덕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때로 세상에 엄청난 폭력적 비극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이것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인가 하는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윤리적 판단 그 위에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해야할 부분이 있다.

다만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에게는 이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3. 하나님의 모든 주권적 행위는 인간에게 모두 계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해의 한계는 하나님이 계시하는 것 만큼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시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만큼만 계시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행적과 모든 의도를 다 추적할 수 없다. 그것이 우리 피조물의 한계이고 인간 이해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가나안 정벌기 같은 사건으로 하나님을 헤아리는 것은 잉크병에 담긴 물로 바다를 헤아려보려는 시도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불가해성은 그분의 하나님 되심의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우리 수준에서 완전히 파악될 수 있는 분이라면 그분을 하나님되심은 인간이해의 수준만큼이나 제한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4. 가나안 정벌기에는 적용의 특수성이 있다. 성경의 말씀 중에는 일반적 원리와 특수한 원리가 있다. 일반적 원리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원리들이다. 특수한 원리는 특정한 시대와 상황에 주어진 적용의 원리이다. 안식일의 문자적 적용은 구약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주어졌지만, 예수님과 초대교회는 안식일의 적용을 더 넓게 했다. 구약제사는 이스라엘이라는 선민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는 문자적으로 그 말씀을 지키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정벌은 오늘날 그대로 문자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다만 안식일, 제사 등에서 우리는 영적인 원리들을 발견하듯이, 가나안 정벌에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가나안 정벌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정벌하고, 호주 백인들이 애버리진 원주민들을 정벌하고, 기독교 서구제국들이 다른 나라들을 식민지화하는 근거로 사용하였다. 이것은 성경적용의 특수성을 왜곡한 결과들이다.

5. 계시된 가나안 정벌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언약의 성취와 거룩한 공동체의 형성이다. 가나안 정벌기는 어떤 상황에서도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주변문화와는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늘 본문 17절을 NIV에서는 "Completely destroy them!"이라 되어있다. 가나안적인 것은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기를 원하셨다. 왜냐하면 그 남은 것들이 이스라엘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9/09/12

우리의 마음은 전파력이 있다

---
신20:8 "...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한 사람의 두려움은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갈 때에는 제사장들이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말하고,이어서 군대인솔자들이 병사들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몇몇 사람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이 다른 병사들을 낙심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은 전파력이 있는 것 같다. 긍정적인 마음도, 부정적인 마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쉽게 전파한다. 이스라엘이 광야생활할 때 정탐군들의 불신과 원망의 마음은 곧 온 이스라엘에게 전파되어 그들이 40년을 광야에 머물러야 했던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나에게 아직 해결되지 않은 부정적인 마음이 있으면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다. 나의 부정적인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소망을 가진 이들을 낙심케하고 더 나아가 공동체를 해롭게할 수 있기때문이다. 본문에서는 그런 마음이 있는 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몸으로 함께하는 것 이상으로 마음으로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울도 우리에게 이렇게 권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9/06/12

도피성이 있는 사회가 아름답다

신명기 19:3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도피성이 있는 사회가 아름답다. 살인자를 처벌하는 것은 정의다. 그런데 정의의 하나님은 도피성을 마련하신다. 도피성은 정의 이상의 그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정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최상의 대답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그분은 이 여인에게 용서의 도피성을 제공하셨다.

죄인된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의 기준으로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의 도피성을 마련하셨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항상 "옳은" 문제를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옳은 문제가 항상 누군가를 정죄하는 도구가 되곤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은 제사가 아닌 긍휼을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경우 교회 공동체는 "옳은" 것을 말하는 이들로 인해서 고통을 겪는다. 그러
나 주님은 우리가 그 이상의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도피성이 있는 공동체가 아름답다. 죄와 실수와 허물이 있는 사람들도 피할 곳이 있는 사회가 아름답다. 죄를 정당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모든 인간은 정의로만은 갈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티모데 켈리 목사는 그의 저서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성경의 정의는 긍휼을 품는 것이라 했다.

우리의 공동체에서 도피성을 보았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누군가에게 언제든지 달려올 수 있는 도피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9/03/12

지도자가 조심해야할 네가지

신명기 17:16-20말씀을 보면 지도자가 조심해야할 네가지가 나온다.

1. 파워.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16절).

2. 정욕.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17절).

3. 탐심.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17절하)

4. 교만.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20절)

9/02/12

우리가 영원히 해야할 일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로렌스 형제에게 누군가가 물었다: "죽음이 다가오는 이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로렌스는 답했다: "지금 나는 내가 앞으로 영원히 하게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고 하나님을 숭모하고 나의 전심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바치는 일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다른 것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할 유일한 일입니다." -A.W.토저, 예배인가 쇼인가?, 46.


우리가 영원히 해야할 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예배자와 일꾼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예배자를 원하신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것은 우선 우리가 예배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일꾼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배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사람만이 훌륭한 일꾼이 될 수 있다." -A.W.토저, 예배인가 쇼인가?, 38.

우리는 너무 일 중심으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만나고자 하시는데..

하나님은 디테일에 강하다

신18:3 “제사장이 백성에게서 받을 몫은 이러하니 곧 그 드리는 제물의 소나 양이나 그 앞다리와 두 볼과 위라 이것을 제사장에게 줄 것이요”

오늘의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이 제사장이 취할 수 있는 세밀한 부분까지 언급하셨다는데서 놀라게 된다: "앞 다리, 두 볼과 위..." .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 우리는 디테일이 빠진 허상의 신앙을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에 디테일이 빠져버리면 허상이다. 부흥과 영혼구령을 말하지만, 디테일이 빠져버리면 그저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마음은 "전심"이어야 하지만, 우리의 헌신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9/01/12

거꾸로 살자

"순종은 자유에 이르는 길이고 겸손은 기쁨에 이르는 길이며 연합은 인격에 이르는 길이다."
- C. S. Lewis‏ -

십자가의 길이 영광의 길이었듯이, 사람들의 추구와 정반대의 길을 걸어야 하나님이 만날 수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