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12

"다 무너뜨려지리라"

"다 무너뜨려지리라"(막13:2).
이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AD 70년에 무너졌다.
언젠가는 모든 건물들도 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이 땅에 쌓아둔 보물도 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이 지혜다.
나는 곧 무너질 다리를 건설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28/12

두 렙돈 교인, 두 렙돈 교회

예수님이 신앙인의 모델로 내새울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마가복음 12:38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두렙돈을 헌금한 한 과부를 내세우신다. 직전에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율법학자에게 질문을 받으셨고, 이들의 신앙형태를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주의를 주셨다. 이 과부는 율법학자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는 모습이었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을 칭찬하셨다.

그런데 주님이 칭찬하신 이 여인은 오늘의 교회에서도 별로 주목받지 못할 것이고, 아무도 그를 신앙인의 표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 같다. 주님의 생각은 다르시다. 주님에게는 두 렙돈의 소박한 모습이지만, 마음의 진실을 담은 신앙인이야말로 진짜 신앙인이다.

우리는 점점 내면의 진실보다는 외적인 화려함을 중시하는 것 같다. 교회들도 자기를 특징지우기 위해 온갖 자극적이고 화려한 구호들로 교회를 브랜드화하려고 한다. 단순한 예배마저도 우리는 그것을 자기 교회만의 브랜드로 만들고 싶어 OO예배, OO 사역 등으로 교회를 치장하지만, 그러는 중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단순함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위치에 있었고 그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사람들에게 문안받는 것과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당연시하였다. 당시 기독교 신문이 있었다면 이들의 행적이 계속 뉴스의 초점이 되었을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찾고 싶은 신앙인은 온갖 화려한 조명과 사람들의 칭송을 받는 그런 인물이 아니라 두 렙돈의 헌금을 드린 과부였다.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 않는 두렙돈의 모습이지만, 마음의 진실을 가진 그런 사람을 신앙인이 표상으로 제시하신다.

또한 주님이 보고 싶어하는 교회도 그런 두 렙돈의 교회인지 모른다. 화려한 구호가 없고 두 렙돈 만큼의 교인들과 두 렙돈의 찬양실력을 가진 찬양대와 두 렙돈의 설교실력을 가진 목회자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 만큼은 두 렙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전심을 드리는 교회, 하나님이 정말 보고 싶은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닐까?

2/24/12

버린돌 vs 모통이 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막12:10)
예수는 어떤 이들에게는 거절과 배척당했으나, 우리들에게는 구원의 머릿 돌이 되셨다. 하나님은 예수 뿐 아니라 세상적으로 가치있게 여겨지지 않던 이들을 보석처럼 쓰시는 이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는 버림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초석으로 삼으실 수 있다. 그런 우리들을 써 주시니 그저 감사...감사...

2/23/12

안전한 믿음 vs 위험한 믿음

믿음에는 위험한 행로가 있다. 마가복음 11장에서 무화과나무 저주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의 모험을 하기 원하신다. '이 산이 바다로 옮겨지라'는 류의 기도는 위험한 기도다. 예수님의 무화과에 대해 '영원히 열매맺지 못하리라'는 선포는 위험한 선포였다. 우리는 이런 위험한 선포를 회피한다. 그리고 안전한 믿음을 추구한다. 하나님이 들어주시면 좋지만 안들어주셔도 괜찮습니다 식의 기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믿음은 아니다. 믿음의 첫 출발은 담대한 믿음의 선포와 기도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이루어주실 것을 과감히 마음에 그림을 그리고 말로 선포하며 기도하는 것이 먼저 중요하다. 그리고 나서 선포하고 기도한 것이 '되어진 줄로' 믿으라고 하신다.

위험한 코너에 가지 않고는 믿음의 역사를 기대하기 어렵다.

2/22/12

혹시....

마가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다시 한번 성전을 정화하셨다. 처음 유월절 방문때도 그러했듯이 장사하는 사람들을 다시 내쫒으시며, 하나님의 성전을 장사치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하신다. 그런데 혹시 오늘의 교회에서 차방을 운영하는 것은? 서점을 운영하는 것은? 식당을 운영하는 것은? 혹시 예수님은 오늘의 교회에서 차방과 서점과 식당들을 내쫒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채찍에서 우리의 사업이 괜찮은 면죄부는 있는가?

2/21/12

나귀와 종려가지

마가복음은 이름 뜻 그대로 "평화의 도성" 예루살렘에 평강의 왕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유대 왕들은 전시에는 말로, 평화시에는 나귀를 타고 왕의 행차를 하곤했다. 나귀를 선택하심으로 전장의 예수가 아닌 평화의 예수로 각인되기를 원하셨다.

반면 백성들은 종려가지로 예수를 맞이한다. 유대인들에겐 종려가지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있다. 오랜 외세의 침략 가운데 잠시 독립운동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탈환했을 때 그 주역이었던 마카비 일가가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백성들은 종려가지로 그들을 맞이했다. 종려가지는 승리와 해방을 상징한다. 예수는 나귀를 통해 자신의 평화의 메시아임을 각인시키기를 원하셨고, 백성들은 승리와 해방의 메시아를 믿고싶어했다.

사람들은 믿고싶은 바를 믿는 경향이 있다. 오늘날에는 다른 이미지로 예수의 이미지를 둔갑시켜 그렇게 믿고 싶어한다. 구원의 선물은 믿지만, 제자도의 헌신은 믿고싶어하지 않는다. 치유와 위로의 주님은 믿고 싶어하지만, 상처입은 치유자로 교회와 가정 속에 머물러 있기원하시는 주님을 믿고 싶어하지 않는다. 말씀을 사모한다 말하지만, 우리가 의미하는 '말씀'이란 내 기호와 욕구를 만족시켜줄 말씀만을 의미할 때가 많다. 그리고 그런 말씀을 향해 끊임없이 교회를 떠도는 혼령같은 신자들도 많이 보게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를 향해 흔드는 우리의 종려가지는 예수를 향한 찬미가 아니라 내 야망과 염원을 향해 흔드는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2/20/12

인격적 신앙의 함정

흔히 인격적 신앙, 혹은 인격적 종교란 말을 많이 쓴다. 그런데 이것이 남에게 전혀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교양종교를 의미한다면 마가복음 10장의 바디매오의 소란을 믿음으로 칭찬하셨던 예수님도 인격적 신앙의 주인공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데려온 이들이 지붕을 뜯고 하는 소란을 믿음으로 칭찬하셨다. 사회는 기독교가 아무런 소란을 일으키기를 원하지 않는다. 반면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서 "천하를 어지럽히는자"(혹은 소란시키는 자)란 말을 들었다.

만일 인격적 신앙이란 말이 전도를 위해 남에게 다가서는 소란, 혹은 하나님을 열정적으로 찬양하고 예배하는 소란, 혹은 하나님께 소리내어 부르짖어 기도하는 소란을 모두 금지하는 것이라면 성경에서 길거리에서 전도하여 소란을 일으켰던 사도들이나, 부르짖어 기도했던 교회들도 인격적 신앙의 사람들이 아닐 것이다.

신앙의 인격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로 판단해야지, 조용한 정적주의를 인격적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뜻을 오해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소란을 일으킬 정도로 열정적으로 주님께 나오는 자들을 칭찬하셨다. 그것이 믿음이라 하셨다.

2/16/12

어긋난 열심

때로 선한 의도의 열심이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마가복음 10:13에서 제자들은 어린아이를 예수께 데려온 이들을 꾸짖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주님을 위한 열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열심이 예수님의 분노(막10:14)를 초래했다. 이 열심은 주님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교회를 위한 선한 마음일 수 있고, 기독교 복음을 위한 열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뒤이은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면 제자들의 이 열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훼손했다. 예수님이 그리신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도 영접받고 약자도 가난한 자도 대접받을 수 있는 나라이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 나라를 훼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의 모습으로, 약자의 모습으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단순한 모습으로,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의 모습으로 세상에 소금처럼 스며드는 나라다. 그러나 우리의 열심은 하나님 나라를 제국으로 만들고, 제국의 이름으로 십자군도 만들고 마녀재판도 만들고 유럽인들의 아시아 식민지 선교도 만들고 호주의 원주민 사냥도 만들었다.

바울은 하나님께 열심이 많았던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로마서 10:2-3)

2/15/12

성경의 아전인수식 해석을 경계하며

때로 우리는 성경을 우리 편리한대로 해석하고 그렇게 믿는 경향이 있다. 마가복음 10장의 이혼문제를 질문했던 이들이 그러했다. 당시 어떤 이들은 아내를 버리는 근거로 성경의 어떤 구절을 이용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 구절을 재조명해주셨다. 이혼증서를 주라함은 이혼을 장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의 완악함 때문에 발생하는 피해들로부터 여성들과 가정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사실, 결혼은 하나님이 짝지워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창조섭리로서 신성한 것이라는 사실, 이혼의 형식을 빌어 배우자를 저버리는 것은 간음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셨다.
말씀이 풍성한 시대에 "여호와의 말씀을 인하여 떠는" 태도가 절실하다

2/14/12

물 한그릇의 사역

우리는 큰 일을 통해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한그릇을 대접하면 상을 잃지 않으리라 말씀하신다. 큰 사역의 기회는 많지 않지만, 물 한 그릇의 사역의 기회는 많다. 전화 한통, 작은 미소, 격려의 메세지, 함께 하는 식사 한끼. 물 한그릇의 사역을 통해 주님 나라는 확장되어 간다.

2/12/12

복음은...

“The gospel is not the first ‘step’ in a ‘stairway’ of truths, rather, it is more like the ‘hub’ in a ‘wheel’ of truth. The gospel is not just the A-B-C’s but the A to Z of Christianity. The gospel is not just the minimum required doctrine necessary to enter the kingdom, but the way we make all progress in the kingdom.” 복음은 진리의 첫번째 계단이 아니라 수레바퀴의 축과 같다. 복음은 그저 첫번째 알파벳 "A-B-C"가 아니라 A부터 Z까지 기독교의 모든 것이 된다. 복음은 단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교리가 아니라 그 나라 안에서 우리의 모든 행진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 길이 된다 -Timothy Keller


2/10/12

오늘날의 목회자의 자리

목회자의 자리는 늘 고민거리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목회자가 있어야할 자리를 잘 정리해 주었다고 생각된다.

  1. 성경 분석가보다 영적인 현자가 되라(From Bible Analyst to Spiritual Sage).
  2. 계속 말하는 사람이 되기보다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From Broadcaster to Listener).
  3. 테크니션이 되지 말고, 영적인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친구가 되라(From Technician to Spiritual Friend).
  4. 전사나 세일즈맨이 아니라 댄서가 되라(From Warrior/Sales Man to Dancer).
  5. 아마추어가 되라(From Careerist to Amateur).
  6. 목사는 대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다(From Problem-solver to Co-quester).
  7. 변호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과하는 사람이다(From Apologist to Apologizer).
  8. 위협하고 가르고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품고 끌어안는 사람이다(From Threat to Includer).
  9. 원맨쇼보다는 팀 빌더가 되라(From Solo Act to Team Builder)

2/04/12

상아래 개들도...

때로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 대해 분노한다. 그들이 말이나 행동에 상처가 되었고, 실제로 그들이 그런 소지를 남겼을 수도 있다. 마가복음 7장의 수로보니게 여인의 반응은 달랐다. 우리시대엔 상처로 여겨질 예수님의 냉담한 반응에도 '상아래 개들'에게도 주인의 은혜가 내리듯, 그런 은혜를 내려달라 간청한다. 분명 예수님은 오해의 소지를 남기셨다. 그럼에도 여인의 겸손은 침묵과 냉담을 은혜의 현실로 바꿨다. 우리의 들끓는 분노와 격한 감정 아래서 우리는 이 여인의 겸손을 가졌는지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2/03/12

Inside out

예수님은 막7장에서 거룩은 Inside Out이라 선언하신다. 내면에서 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하신다. 거룩은 구별을 의미하며, 외형이 아닌 내면의 모습이 사람을 구별짓는것이다. 오늘의 말씀 중에 주의를 끄는 단어가 '생각'이다. 외형적인 경건함을 가지고 있어도 내면의 생각은 여전히 세속적이고 현세적이라면, 예수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바, 이것들은 이방인들도 구하는 것이라 하셨듯이, 생각의 차별성이 없으면 세상사람들과의 구별성도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일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은 늘 우리의 현실을 가지고 고민하고 염려하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거룩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우리의 생각 속에 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