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14

자리

"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삼상15:16)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어떤 '자리'(position)를 취하게 된다. 원하여도 그 자리를 얻지 못하는가 하면 원하지 않았는데도 그 자리에 않게 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리로 인해 교만해지기도 하고 자리를 얻지 못해 패배자 의식을 갖기도 한다.
오늘의 이 말씀을 통해 자리에 대한 성경적 입장이 잘 조명되었다고 본다.

1.자리는 위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과 주권을 믿는다.우리에게 어떤 자리를 주시든 토기장이 앞에선 질그룻의 심정으로 겸허하게 그 자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2.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사울이 왕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은 그의 실력 때문이 아닌 겸손함 때문이었다. 은혜는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현대 리더십 이론은 리더는 리더로서의 '자격'을 갖추자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리더로서 끊임없이 자기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리더의 자리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은 때로 자격이 부족해도 그를 세우셔서 위대한 일을 하신다.

3.자리는 우리를 병들게 하는 경향이 있다. 사울은 왕의 자리에 있으면서 변했다. 스스로 작게 여기는 초심을 잃었다. 사울 뿐 아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자리로 인해 스포일되고 망가지는 경우들을 흔히 목격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 밑바탕에 있는 탐욕과 자리가 만날 때 사람은 쉽게 부패해 버린다. 역사는 그 변질을 막기 위한 수 많은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해왔지만 완전한 제도는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스스로가 매일 십자가 앞에 엎드리지 않는 한 여름철 음식 상하듯 부패를 막기는 어렵다.

4.우리는 우리의 자리를 두려운 마음으로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이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사울이 겸손했을 때 그를 높이셨고, 그가 교만해지자 그를 폐하셨다. 교만은 인간의 원죄다. 천사도 이로 인해 타락했고 인간들도 이로 인해 타락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은 반드시 끌어내신다. 그러므로 두렵고 떨리는 심정으로 우리의 자리를 겸허히 감당해 나가야 한다.

2/13/14

히나님의 인도하심

" 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의 노가 크게 일어나"(삼상11:6)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뜻을 보여주신다.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과정에서 이 점이 드러났다.

먼저 사무엘을 통해 여러 징조를 보여주시고 체험케 하셨다. 그리곤 온 회중 앞에서의 제비뽑기를 통해서 사울을 뽑으셨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암몬 족속의 일로 자연스럽게 그에게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케 하셨다.

즉 사무엘을 통해선 직접적 계시, 제비 뽑기를 통해선 사람들 가운데서의 인도하심, 암몬 족속의 일을 통해서는 상황적 인도하심을 경험케 하셨다.

우리는 자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키는 경우도 많이 있다. 우리 모두는 오류의 가능성이 늘 있기 때문에 다양한 관점에서 주의 뜻을 확인해 가야 한다.

하나님은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늘도 다양한 채널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오시는 분이시다. 귀를 열자.

2/11/14

스포일러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삼상10:10)

사울의 이야기는 스포일러에 의해 스토리가 노출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우리는 그의 결말을 안다. 후일에 빛이 바랜 그의 인격과 모진 행동들과 불순종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첫 등장의 이야기는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앞으로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더 잘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무너질 집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부르시고 인도해가시는 장면은 매우 세심하고 특별하다. 사무엘을 통해 여러가지 징조를 보여주어 그의 부르심을 확신시키시고, 선지자들의 무리들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특별한 경험도 하게 된다.

사울 뿐 아니라 우리 인생 또한 스포일러된 드라마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보스럽게 결정하게 될 많은 선택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 우리들의 미래에 있을 그늘진 모습도 이미 보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대충이 없다. 설사 우리가 주님께 최고의 인생을 살게 되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으로 대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 이해 못한다. 무너질 집에 왜 그리 정성을 다하시는지,  깨어지고 말 인생을 왜 그리 붙들어 주셨는지.... 다만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우리가 사울과 같은 존재라 해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우리를 대해주신다는 것이다.

2/06/14

있음과 없음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8:19-20)

언젠가 이원복씨의 글에서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을 비교하면서 한국인의 가장 큰 특징을 평등이라 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가 말한 한국인의 평등사상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나도 평등히 가져야 하고 다른 이들이 누린 것을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을 못배겨낸다 했다.

삶에는 어쩔 수 없는 차별이 있다. 기회의 차별이 있고, 부와 지식과 능력의 차별이 있다. 우리는 공평한 사회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 있다. 모짜르트의 재능을 살리에르가 아무리 질투한다 해도 그의 것이 될 수 없었고, 우리가 누리는 지금의 부를 지구상의 많은 나라들이 똑같이 누리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할 수도 있다. 

불평등을 고착화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이 가진 것을 내가 갖지 못한다 해도 '없음'이 반드시 불행은 아니고, '있음'이 반드시 행복은 아니다. 때로는 '없음'이 우리의 독특성이 될 수도 있다.

이스라엘엔 왕이 없었고 다른 나라들에는 있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람들은 다른 나라에 있는 것을 자신들도 갖기를 원했다.  왕의 없음이 그들 민족의 미약함으로 여겨졌고, 강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선 왕이 필요하다 요구했다.

 '없음'이 사실은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를 가시화하기 위해서 왕적 존재를 세우기 보다는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사람들이 민족을 이끌어가게 하셨다. 불완전해보이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독특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을 가짐으로 그들만의 냄새가 사라지게 되었다.

다른 이들의 '있음'을 꼭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나의 '없음'이 하나님과 나의 독특한 이야기가 되고, 우리의 약함이 하나님의 강함이 되고, 우리의 비움이 하나님의 채움의 길이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왕의 자리를 비워두심으로 하나님이 그 자리를 채우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한다. "나는 나의약한 것을 자랑하리니..."

2/04/14

여기까지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삼상7:12)

오늘의 묵상의 말씀에서 크게 다가온 단어는 "여기까지"이다. 벧갈아래 지역은 20년전에 패전한 후 블레셋 땅이 되어 버려 그 이후로는 감히 회복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땅이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감히 그 땅을 회복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사무엘은 에벤에셀을 고백하며 기념의 돌을 세운다. 뜻은 '여기까지 도우셨다'다. 자신들의 아픈 기억과 패배가 있었던 장소가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 회복은 엘리 제사장을 대신한 사무엘과 같이 지도자가 바로 세워졌고, 미스바 회개운동에서 처럼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 일어났음을 주목한다. 그들은 "미스바"에서 나가서 "벧갈 아래" 지역을 회복했다.

그들이 회개하고 자신들을 바로 세운 미스바에서 출발하였을 때, 과거의 패배와 아픔이 승리와 치유가 되었다. 에벤에셀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미스바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