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6/09

느12:31-47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

드디어 그날이 왔다.성전이 완공되고, 백성들이 즐거이 봉헌식을 올리는 장면은 감격 그 자체였다. 그 현장에 있었던 느헤미야는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되었겠는가?  느헤미야 1장에서는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은 불타고 백성들은 유린당하고 있었던 현실이었다. 느헤미야의 마음 속에 감동이 있어서 고국으로 올 생각이 났고, 총독의 자격으로 왔고, 백성들을 독려해서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산발랏 일당의 방해도 있었고, 내부 백성들의 지도자들의 도덕적 타락의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성벽은 재건되었고, 학사 에스라의 주도로 수문 앞에서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대대적인 초막절을 지키며, 참회의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봉헌식을 갖게 되었다.
'여호와께서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날은 왔다.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자녀들이 많아질 것을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움직였다. 그러나 그날은 쉽게 오지 않았다. 어느날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푸념을 한다. '저는 무자하오니, 제 상속자는 제 종 엘리에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네 몸에서 난 자가 네 후사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겨주셨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갱신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도 이후에 절망의 순간이 있었고, 이스마엘이 태어났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그날이 왔다. 웃음이라 불리는 이삭이 태어났다.  '여호와께서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다.'

우리들이 보고 싶은 그날이 있다.  가정에서 올 것 같지 않는 그날을 기다린다. 교회에서도 올 것 같지 않은 그날을 기다린다.
주님께서는 지금 내게 믿음으로 서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


8/25/09

느12:1-30 영적 재건의 현장에서

느헤미야 시대 전후에 이스라엘의 영적 재건이 이루어졌다.
오랜 포로생활 가운데 있다가 포로들이 귀환할 수 있다는 명령과 더불어
이스라엘의 재건이 시작된 것이다.
본문에서는 몇가지 점을 지적한다.

먼저 영적 재건의 씨앗이되었던 사람들을 기억한다. 바로 제사장들이다.  1기 포로귀환자들로서 스룹바벨과 함께 온 이들로서 예수아가 대표로하는 제사장들의 명단을 기록한다. 여기에 에스라도 포함되었지만, 특별한 언급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후예로서 요아킴이 대표하는 제2기 제사장들의 명단이다. 제2기 제사장들은 모두 1기 제사장들의 자식들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이 바로 씨앗의 원리가 아닌가 싶다.  모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씨앗의 역할을 하는 이들이 있다. 1기 제사장 그룹은 많은 고생을 했을 것이다. 최초 귀환자로서 아무 것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은 모든 것을 개척해야했다. 그 개척의 시기에 그들은 초라하지만 성전도 재건했다. 그들은 느헤미야 8장 이후에 나오는 영적 부흥의 현장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 부흥은그들이 씨앗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의 교회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원리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누군가 씨앗이 되어주어야 그 다음세대라도 그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모두 영광을 바라지만 자신들이 씨앗이 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둘째로 제사장들과 함께 레위인들이 언급되어 있다. 제사장들도 중요 인물들이지만 성전봉사에 있어서 레위인들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제사장들은 부각되는 반면 레위인들은 잘 부각되지 않는다. 제사장들은 제사와 관련된 중요 직책을 맡지만, 레위인들은 주로 허드렛일들을 맡는다.  오늘날의 교회 상황에서도 비슷한 면이 있다. 어떤 사역과 봉사는 사람들의 부각을 받고 영광을 받는다. 반면 어떤 사역은 그늘질 사역이다. 그런데 오늘 똑같이 레위인들을 언급하는 것을 보라. 주님께서는 내 사역이 영광의 사역인가, 그늘의 사역인가 상관없이 똑같이 기억해 주신다.
셋째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동역이다. 그들의 주된 역할은 달랐다. 느헤미야는 주로 성벽재건과 체제정비의 역할을 맡았고, 에스라는 율법을 가르치고 영적 재건에 앞장섰다. 이들의 성격은 달랐다. 느헤미야는 과격하고 실제적인 반면에 에스라는 조용하고 학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동역했다. 이것을 동역의 원리라 부르겠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영적 재건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는 바로 이 동역의 원리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동역으로 하나님읜 나라를 펼쳐가신다.

8/24/09

느11장을 통해 바라보는 비전

느헤미야 11장 끝부분에서 제가 갖고 싶은 몇가지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첫번째는 사람들에 대한 비전이다.
느헤미야 시대는 포로귀환시대였다. 모든 것이 정비되지 않은 시기였다.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하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교회를 새로 시작하고 나서도 비슷한 심경이다. 이제 2년차를 향해 가는  여정에서 아직도 정비되어야할 것이 많다.  그간 느헤미야도 가장 시급한 성벽재건 뿐 아니라 느헤미야 8장에서의 영적 부흥을 경험하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새롭게 출발시켜가는 지도자 역할을 감당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이 모든 일에 함께 일할 사람들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아니겠는가?
본문에서 성전을 총 감독하는 레위인의 대표로 웃시를 세우고, 일반 백성들의 업무를 위해서는 브다히야를 세웠다. 이것이다.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에서도 이 일을 위해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에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 먼저 이들을 준비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사역을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는 것 같다. 먼저 사람을 준비시켰을 때 하나님의 사역은 진행된다.  꿈꾸는 사역, 하고 싶은 사역, 하나님이 부담을 주시는 사역들이 있다. 그러나 함께할 동역자들이 없다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지 않은가?  내가 보고 싶은 비전,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 곳곳에 준비된 사람들이 세워져서 맡은 바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 그것을 보고 싶다.

두번째로 보고 싶은 것은 이땅의 영토를 되찾고 싶은 비전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팔레스틴 땅은 포로시대에 버려졌었다. 처음부터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땅에 대한 약속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 때문에 그 땅을 잃어버렸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사람들은 돌아왔다. 그리고 땅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잃어버렸던 땅들에 유다사람, 베냐민 사람, 그리고 레위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처음 되찾은 땅은 작은 지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와서는 갈릴리까지 그들의 영토가 확장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처음 되찾은 땅은 작은 부분이었지만, 점차 그 영토는 확장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이름들, 지명들은 우리에게 낯설기만 하다. 그러나 그 이름들이 내 주변의 지명들로 바뀐다면 어떨까? 싸우스포트, 아룬달, 라브라도, 벌리헤드.....그 지역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채워지는 꿈을 갖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지경이 더욱 넓혀져서 골드코스트, 쿠메라, 브리즈번까지 그 영적 영향력이 확장되는 꿈은 어떨까?  그것을 보고 싶다. 각 영토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거주하고, 세워지는 비전  그것을 보고 싶다. 야베스의 기도가 생각난다.  "나의 지경을 넓히시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