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1/10

우리는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열왕기하 16장에서 하나님은 우리는 인도를 받아야할 존재임을 보여주셨다.  당시 북쪽과 남쪽 이스라엘를 둘러싼 정세는 격변의 시기였다. 앗시리아의 디글랏 빌레셋이 등위하면서 주변국들을 잠식해 들어가자 아람왕을 중심으로 북이스라엘, 에돔 등이 반앗시리아 동맹을 맺고 유다도 동참하기를 원했지만, 유다는 이를 거절한다.  그러자 아람왕과 북이스라엘 동맹국이 유다를 쳐들어오고 유다의 상당부분의 땅을 탈취한다.
이에 유다는 앗시리아 왕에게 원조를 요청하지만, 이사야 선지자는 이것은 도리어 화만 될 뿐이라고 요청하지 말 것을 전하지만 유다 왕은 듣지 않는다.  앗시리아 왕은 와서 블레셋을 정벌하고 북이스라엘을 속국으로 만들고 아람왕을 죽이고 아람국을 멸망시킨다.

어찌보면 유다왕의 선택은 현명한 선택처럼 보였다. 그러나 결국 앗시리아를 끌어들인 것이 유다의 미래에 큰 화근이 되었다.  잠언 말씀에 '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하셨다. 지금은 내게 최선의 선택, 혹은 유일한 선택처럼 보이는 길들이 내게 저주의 길이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신다. 문제는 우리는 당시에 어떤 길이 생명의 길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과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인도받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 인도받는 길이 최선의 길이다.

8/30/10

설명할 수 없는 싸이클

열왕기하 16장에서 설명할 수 없는 싸이클이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웃시야, 요람은 선한 왕이었다. 그의 아들 아하스는 매우 악한 왕이었다. 그의 아들 히스기야는 매우 선한 왕이었다. 선한 왕이라고 꼭 선한 아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악한 왕이라고 꼭 악한 아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변칙성 앞에 부모로서 겸손을 배우게 된다. 부모로서의 영향력만으로 자녀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한편에서는 감사하고 한편에서는 겸손하게 만든다.
스캇 펙 박사는 '아직도 가야할 길' 마지막을 '은총론'에 대해서 언급했다.  정신과 의사로서 수많은 사람들을 치유하면서 똑같은 증상에 똑같은 처방을 내려도 어떤 이는 치유되고 어떤 이는 치유되지 않는가를 생각하면서 의사로의 겸손을 이야기하고 치유는 은총이라 했다. 목회도 은총이다. 자녀 양육도 은총이다.

8/27/10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열왕기하 15장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신다. 여로보암 2세때의 이스라엘은 최고의 중흥기였다. 가장 넓은 영토의 강력한 국가가 되었을 뿐 아니라 선지자 아모스가 오히려 사치스러움을 질책할 정도로 부유한 나라였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끝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후에게 들려주셨던 말씀, 4대만에 끊쳐질 것이라는 말씀이 여러보암의 아들대에 갑자기 일어났다. 그의 아들은 겨우 6개월만 다스리다가 쿠테타에 의해 죽임당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었다.

오늘날도 여로보암2세 때처럼 끝은 오지않을 것 같은 그런 때이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그 말씀은 그대로 되어지리라. 그리고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많은 말씀들도 하나님의 때에 그대로 되어질 것이다. 말씀은 살아있다!!!

8/26/10

악인이 번영하는 이유

열왕기하 14장에서 곤혹스러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여로보암 2세는 북이스라엘 왕중에서 가장 번영과 부귀를 누렸던 왕이다. 그의 시대에 북이스라엘의 땅은 가장 넓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는 악한 왕이었고, 우상숭배의 길을 따랐던 왕으로 소개된다. 왜 하나님은 이런 악인들의 번영을 허용하시겠는가? 우리는 그 뜻을 다 알 수는 없다. 다만 본문에서 몇가지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과정 속에 있을 때이다. 본문에서 요나서를 기록한 요나가 여러보암 이전에 활동했음을 말하고, 요나의 예언대로 그의 영토가 확장되었음을 지적한다(25절).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가 실현되는 그 과정 속에 있었기에 여로보암은 번영을 경험했다.

둘째 이유는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26절에서 이스라엘의 고난과 다른 도울자가 없음을 하나님께서 보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왕이 악한 왕이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셨고, 그 긍휼 때문에 이스라엘을 고난 가운데서 건져주셨다.

세째 이유는 아직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 없애겠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여로보암의 시대가 지나고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당하고 만다. 그의 때는 아직 심판의 때가 아니었다.

악인들의 현재의 번영이 하나님의 축복을 보증한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의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며, 공의의 하나님께서 언젠가 심판의 시간에 오셔서 당신의 정의를 드러내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때로 불합리해보이는 현실에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8/25/10

성공이 화가 되는 경우

열왕기하 14장에서 하나님은 성공도 화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성공이 우리를 교만하게 할 때, 성공이 우리로 하여금 경청하지 못하게 할 때,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를 높이게 만들 때 화가 된다.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 승리가 화가 되었다. 마음이 교만해져서 이스라엘에 결투신청을 했고, 결국 본인과 다른 이들은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 갔고, 성전 보물들은 탈취당하고 예루살렘 성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교만은 경청하지 않는 태도로도 나타났다. 요아스의 말에도 그러했고, 대하25장의 선지자의 말에도 아마샤는 경청하지 않았다. 잠언은 교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왜냐하면 교만한 자는 오히려 미워하되, 겸소한 자는 그 책망을 받아들인다고 했다. 겸손의 한 시금석은 다른 이의 말을 얼마나 진심으로 경청하는가이다. 그런데 종종 성공은 우리에게 다른 의의 말에 귀기울지 못하게 만든다.
교만은 자기 우상화로 나갔다. 역대하 기록을 보면 아마샤는 에돔과의 전투에서 에돔 우상을 가져와 섬긴다. 이것은 당시 다른 나라를 정복했을 때의 전리품으로 취하던 일반적인 행태였다. 그러나 이것이 우상숭배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신상숭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마샤의 자기 성공에 대한 숭배였던 것이다.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보다는 사람들이 성공으로 자기를 높일 때 하나님은 그를 낮추신다.
성공이 우리를 교만하게 만든다면, 경청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하나님께 영광돌리지 못하게 만든다면 축복이 아니라 화가 된다.

8/24/10

하나님은 철저한 신앙을 기대하신다

열왕기하 14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철저한 신앙을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마샤 왕은 대체로 선한 왕이었다. 요아스의 길을 따라 행하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나 "다윗"만큼은 아니었다. 또 "산당"은 그대로 두었음을 지적한다. 하나님은 '대충'으로 만족하지 않으신다. 철저한 헌신을 기대하신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신앙의 표준이 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왕들이 다윗만큼 되기를 기대하셨다. 그리고 우리들도 이 시대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표준이 되기를 기대하신다.  Radical 할 정도로 철저하기를 원하신다. 차선은 최선의 최대의 적이다.

8/23/10

믿음의 나비효과

열왕기하 13장에 나오는 북왕 요아스의 행적은 오늘날의 세계관으로 선뜻 납득하기가 어렵다. 요아스는 악한 왕이었고, 여로보암의 죄를 따르는 자라는 악한 왕의 일반적 행태를 따랐다. 그런데 엘리사가 죽자 그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엘리사는 활과 화살을 가지고 오라하여, 활을 쏘게하고, 화살로는 땅을 치게 한다.  그리고 거기에 따른 요아스의 행동에 따라 앞날이 어떻게 달라질지를 엘리사는 예언을 한다.

만일 요아스가 엘리사를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만일 활을 가지고 다르게 했더라면... 만일 화살로 세번이 아닌 다섯 번이나 그 이상을 쳤더라면  결과는 똑같을까?  

요아스의 얘기를 통해 나비효과라는 말이 떠올랐다. 한쪽에서의 나비의 작은 날개짓이 다른 쪽에서는 커다란 태풍을 몰고올 수도 있다는 얘기.  비록 악한 왕이었지만, 그의 선택, 그의 행동에 따라 한 나라의 미래가 결정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작은 선택, 작은 생각, 한두마디의 기도, 누군가를 돕는 작은 손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엄청난 태풍을 몰고 올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모든 순간은 소중하다. 오늘의 작은 겨자씨앗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위대한 거목이 될 수 있으리라. 겨자는 결코 나무가 될 수 없는 들판의 잡풀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그 작은 씨앗이 상식을 뛰어넘는 거대한 나무가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얘기...  오늘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산 제물로 드리자.

8/22/10

세가지 Fear Factor

느헤미야 6장에서 세가지 Fear Factor를 만날 수 있다. 첫째는 소문이요 둘째는 안전에 대한 불안이요 세째는 소외이다.
적들은 먼저 악성 소문으로 느헤미야를 위협했다.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는 것은 반란을 기도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또 스마야 선지자를 통해서 느헤미야의 신변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안전한 장소로 가서 숨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추천한 곳이 제사장 외에 들어갈 수 없는 성소였다. 안전에 대한 두려움으로 범죄를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또 유다 귀족들은 도비야와 함께 견고한 inner ring을 형성하고 서로 결탁되어 있었다. 유형이든 무형이든 어느 집단에서 소외당하는 것 또한 사람의 근원적 두려움 중에 하나다.

느헤미야가 경험한 Fear Factor들은 오늘날도 강력한 요소이다. 문제는 두려움이 범죄가 될 수 있고, 두려움으로 인해 타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 경외(두려워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는 자는 다른 것들이 작게 보일지니...

8/21/10

슬픔이 분노가 되지 않게...

신문기사. 4년전 10살난 딸아이가 피살당한 부모가 딸아이가 매년 1000만원씩 딸아이가 산 햇수 10년간 1억원을 기증하겠다고 밝히며 한말 : "슬픔이 분노가 되지 않게 작은 실천을 하려고 한다."
슬픔이 분노가 되지 않게...궁핍이 추함이 되지 않게...평안이 안일이 되지 않게 하소서

세가지 질문

느헤미야 5장에서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세가질 도전적인 질문을 합니다.  1) 그들은 우리의 형제가 아니냐  2) 이방인들의 비방을 생각하지 아니하느냐  3)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할 것이 아니냐?  이것은 오늘의 교회 내부에 문제가 생길 때 동일하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느 5:8-9)

8/20/10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열왕기하 13장에서 여호아하스 왕은 악한 왕이었으나 그가 기도했을 때에 기도를 들어주셨다. 이유는 백성들이 학대받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그냥 그들을 위해 일하실 수 있었으나,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통해 일하셨다. 비록 여호아하스가 악한 왕이었으나,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일하셨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많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하시리라.

8/19/10

끝까지 믿음지키기

열왕기하 12장의 요아스는 처음에는 성전보수에 열심을 보이는 등 하나님께 열심을 다했으나, 나중에는 신앙을 떠났다. 처음 시작한 길을 끝까지 가는 것이 사실 쉽지 않은 듯 보인다. 어느 책에서 빌리 그래함의 친구 템플턴에 대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오히려 빌리 그래함 보다 더 인기를 누릴 정도로 명설교가였으나, 후에 그는 신앙을 떠났다.  그리고 많은 훌륭했던 신앙의 인물들이 신앙을 떠난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으리라. 다만 매일 매일 우리의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길이 오히려 승리의 길이리라.

8/18/10

하나님은 효율성도 기대하신다

왕하 12장에서 23년간 진척되지 않았던 성전이 드디어 보수되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방법을 직접 제사장에게 가져오는 방식이 아닌 성전 옆에 헌금함에 하도록 변화를 주었고, 제사장들이 아닌 "성전 맡은 자"를 두어 그의 감독 아래 석수, 목수, 미장이, 기타 필요한 이들이 일을 분담하도록 하였고, 성전에 은그릇이나 기타 기물들의 필요가 있었으나 성전보수가 재정지출에 우선권을 갖게 하는 등 여러 변화를 주었더니 막혀있던 사역이 드디어 진척되어갔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의 일을 "충성"스럽게 하기 원할 뿐 아니라 "지혜"있게 효율적으로 하기도 원하신다.

8/17/10

인생의 비극은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12장에서 요시아가 왕으로 등극한 이후 성전보수사업을 결심하고 제사장들에게 맡겼으나 23년간 이 일이 진척되지 않았다. 결국 왕은 제사장들이 이 일은 다른 이의 몫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사명의 몫을 주셨다. 성전 보수사역은 특별이 그 시대의 제사장들에게 맡겨주신 일들이었으나 그들이 감당하지 않자 다른 이들이 그 일을 맡았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우리가 감당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가 아닌 다른 이들을 통해서도 그 일을 이루어 가신다. 비극은 그 일에 우리가 더 이상 쓰임받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최대 비극은 더 이상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최근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증거는 무엇이 있는가?

8/16/10

교회는 유일한 희망

열왕기하11장에서의 요시아의 왕권회복은 감동적이다. 아합의 딸 아달랴와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정략적인 결혼으로 아달랴는 유다의 왕궁에 있게된다. 북쪽에서 예후의 쿠테타로 북쪽의 왕과 남왕국의 왕 아달랴의 아들 아히시야가 동시에 죽임을 당하자, 아달랴는 남쪽 왕궁에서 쿠테타를 일으켜 다윗 왕족의 모든 이들을 살륙하였다. 생존한 유일한 핏줄이 요시아였다. 요시아는 다윗 왕국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 마저 죽으면 다윗 왕국은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요시아를 구출하시고, 오늘 본문은 드디어 요시아가 왕권을 탈환하고 온 백성이 함께 기뻐하는 감격스런 장면이다.
이것은 교회의 스토리와 매우 흡사하다. 교회는 이 땅에 남겨진 하나님의 유일한 희망이다. 하나님은 교회 외에 다른 대안을 두시지 않았다. 그러나 아달랴의 세상에서 요시아는 숨어지내야 했듯이, 오늘의 교회의 위상은 한없이 땅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한다. 어느날 요시아가 다윗 왕위에 영광스럽게 즉위하듯이, 언젠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교회의 부흥이 이땅에 임하며, 온 백성이 이 마땅한 부흥에 함께 기뻐하는 그날이 오리라는 것을...

주여, 이 땅에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을 회복시키소서.

8/14/10

두려움

"두려우신 하나님에 대한 주목할만한 사항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여러분은 그 외의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그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이다." - 오스왈드 체임버스(Oswald Chambers)
하나님을 두려워합시다.

8/13/10

우리의 꿈, 그분의 꿈

열왕기하10장에서 예후는 그간 섬뜩할 정도로 아합가문을 척결했다.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을 앞세워 왕과 그 가족들, 귀족들과 바알의 선지자들을 척결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했다. 쿠테타를 일으킨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 하는데에 아합가문과 국가적 우상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라는 이미지는 성공해했다. 그의 왕권은 견고해졌다.
그 다음이 문제다. 그렇게 무섭도록 바알 신앙을 척결했던 예후는 왕권이 확립된 이후 더 이상 바알신앙 척결에 열심을 보이지 않는다. 벧엘과 단에 세워진 금송아지 우상도 그냥 나두었다. 예후에게는 하나님의 꿈보다 자신의 꿈이 더 중요한 동기였던 것이다. 한동안 그는 하나님의 꿈의 동산을 거니든 듯 했지만, 자신의 꿈이 이루어진 마당에 더 이상 하나님의 꿈에 관심도 열심도 잃어버렸다.

예레미야는 '너를 위해 대사(큰일)를 경영하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위해 큰일을 경영하면서 이를 비전이라 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직하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우리 열심의 진정한 동기는 무엇인가?

8/12/10

Joy is Unplanned

어느 버스에 'Joy is Unplanned'라는 문구를 보았다. 그렇다. 기쁨은 계획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쁨은 의외성, 예상할 수 없음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누군가를 기쁘기 위해서 생일선물을 준비하단든지 하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쁨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받는 이에게는 의외성이 있어야 한다. 흔히 surprising present라는 말도 이 의외성을 노린 것이다. 

C.S. 루이스는 '예상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라는 책을 썼다. 기독교 바깥에서 생각한 바와는 달리 기독교 신앙안에 들어와보니 그 안에서 누리는 보석같은 수많은 기쁨들에 그는 놀랐다. 신앙 안에 이렇게 많은 기쁨이 내재되어 있는 줄을 미쳐 몰랐다.  그러나 기쁨에 대한 그의 묵상의 결론은 이렇게 수많은 기쁨도 결국은 그것 자체가 목적지가 아니라 하나의 표지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쁨을 누리면서 이 기쁨이 시사하는 바는 이 기쁨의 원천에 눈을 돌리게 하고, 그 기쁨의 원천은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가슴 깊은 곳에 이 기쁨의 원천에 대한 지울 수 없는 갈망이 있다. 그렇다면 이 기쁨의 표지판이 가리키고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고 그 예수는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깨고 다가오신다. 그 예상 밖의 예수 모습에 때때로는 당황하지만, 또 한편 예수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여호나답을 찾습니다

왕하 10장에서 쿠테타의 기선을 잡고 이제 수도로 향하는 예후는 자신의 정통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 찾은 인물이 여호나답이었다. 여호나답은 레갑 족속이라 되어있는데 예레미야 35장에서 레갑 족속의 후예가 오늘날로 말하자면 아미쉬적인 생활을 고수하고 있었고, 이런 생활은 그들의 선조중 요나답(열왕기하 10장에서는 여호나답)의 명령 때문이라는 것이다.
왜 여호나답은 후손들에게 이런 명령을 내렸을까? 여호나답은 아합시대의 극심한 우상숭배를 경험하고, 이세벨의 서슬이 퍼런 칼날의 위협 아래 많은 여호와 신앙인들이 신앙을 버리는 변절을 경험했을 것이다. 마치 일제시대의 신사참배처럼.  이제 전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던 인물이 여호나답이었다. 그리고 사회의 풍조 아래서 신앙을 타협하는 많은 이들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후예들은 고지식할지라도 신앙의 정통성, 신앙의 순수성을 그대로 유지해나가기를 원했고, 예레미야에 등장하는 그 후손들을 그것을 지켜나갔다.
우리 시대에는 아합과 다르지만, 강력한 힘으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파고드는 문화적 기류들이 많다. 그 와중에서 예후가 찾은 여호나답처럼, 신앙의 순수성을 그대로 지켜나가는 이들이 정말 있을까?

여호나답을 찾습니다.



8/11/10

예후 사건과 복음 이야기

열왕기하 10장의 예후 쿠테타는 끔찍하다. 이스라엘 왕 요람, 유다왕 아하시야, 이세벨 뿐 아니라, 아합의 아들 70명, 아하시야의 형제 42명, 다수의 사마리아 귀족들과 제사장들이 예후의 칼날에 사라졌다. 우리를 불편케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것들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예후 사건은 두가지 점에서 복음을 조명한다.
첫째는 예후의 칼날은 결국 우상숭배를 가져왔던 아합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끔찍한 심판의 살륙장면은 그 만큼이나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와 인간의 죄악이 혐오스러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죄악은 반드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아합 가문의 죄는 즉시로 심판받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심판받았다.

복음이 얼마나 은혜로운가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얼마나 두려울 정도인가, 하나님이 얼마나 죄악을 싫어하시고 혐오하시는가를 직시하여야 한다.

8/10/10

말씀을 권위 앞에 다시 서다

열왕기하 9장에서 예후의 쿠테타는 아이러니컬하게 이스라엘의 영적인 삶에 치명적 영향을 주었던 아합가문을 심판하는 도구가 되었다. 아합의 아들은 나봇의 포도원에서, 결혼관계로 엮어진 유다왕 아하시야는 므깃도에서 죽임을 당했고, 이세벨은 내시들에 의해 던져져 시체를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그 자녀들은 사마리아에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분노를 반영하는 반면, 다시 한번 말씀의 권위를 생가나게 한다.
엘리야가 예언한 똑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은 죽임을 당했다. 당시 아합과 이세벨의 기세가 등등했던 당시에 엘리야의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미미한 소리에 불과했을 것이나, 결국 말씀이 승리했다. 말씀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접하는 말씀의 소리는 미미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말씀은 말씀 자체의 권위를 가진다. 말씀의 권위 앞에 다시 두렵고 떨리는 심령으로 서야하리라.
 

8/09/10

사람은 평안을 구하고 하나님은 거룩을 구하신다

열왕기하 9장은 아합의 아들 요람이 예후가 일으킨 쿠테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예후 일행이 다가올 때 왕은 '평안이냐'라는 말은  사신을 통해 두번, 자신이 직접 한번 언급한다.  사람들은 평안을 구한다. 반면 예후는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고 응수하며 활을 쏘아 그를 살해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아합가문의 우상숭배와 나봇의 포도원을 강제로 탈취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음을 성경은 보여준다.  사람들은 평안을 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을 찾으신다.

8/06/10

고정관념 깨뜨리기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와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경험을 했다. 이방인 구원은 이들이 잘 가지 않던 미지의 생각의 길이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신 때문에 그들의 오랜 생각을 과감히 버렸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방인 구원과 선교를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는가?

첫째는 신비한 하나님의 체험이다. 베드로는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환상이나 꿈 등은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길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오랫동안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던 주요 방법 중에 하나이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실 수 있다.

둘째는 환경과 상황 속에서의 확신이다. 세번의 환상이 끝나자마자 그의 문앞에 누군가가 도착했다. 고넬료가 보낸 이들이었다. 또한 이들을 통해 고넬료를 만나 그간의 얘기를 듣고나서 더욱더 베드로는 이일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과 상황, 혹은 사건들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보여주신다.

셋째는 성령의 증거들이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도 베드로는 함께 가라는 성령의 음성을 느꼈다.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에도 성령이 강력하게 그들 위에 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부정할 수 없는 성령의 증거들 앞에 베드로는 이 일은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하게 된다. 

넷째는 말씀을 통한 확신이다.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보았을 때에 베드로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주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지하는 일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면서 이일은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게 된다.

인간의 고정관념은 매우 강력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보다 더욱 강력하다. 우리의 생각과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다.

8/05/10

하나님의 선교

사도행전 10장에서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고넬료와 그 가족을 복음을 받을 준비를 하신 것도, 그를 베드로에게 인도하신 것도, 그리고 그의 회심이 본격적인 이방인 선교의 장을 여는 계기가 된 것도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하신 일이었다.
선교는 하나님의 일이다. 다만 우리를 그의 동역자로 부르실 뿐이다. 베드로처럼 우리에게도 복음과 선교를 위해서 마음의 장벽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현장에 그저 순종의 발걸음을 옮길 때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주실 것이라 다시 한번 믿게 하신다. 할렐루야

8/04/10

이상한 하나님의 섭리

사도행전 8장에 보면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서 사람들이 흩어졌고, 흩어진 사람들이 사마리아를 비롯 다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의도는 교회가 흩어져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교회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명령에 순종하기를 주저한다. 그래서 종종 하나님은 자발적인 선교가 아닌 특별한 섭리로 교회가 선교하게 하셨다.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를 통해 복음이 사마리아, 온 유대에 전해진 케이스도 그렇고, 로마 제국시대에 온통 기독교인 그들이 자기들의 세계에 갇혀 더 이상 나가지 않을 때 게르만족 이동으로 유럽 쪽으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졌고, 유럽이 기독교 사회가 되면서 점차 교조화되면서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 복음이 전해지게 되었다.  한국의 경우, 세계의 가장 큰 교회들이 다 한국에 모여있을 정도로 교회의 부흥을 맛보면서도 상대적으로 선교에 드리는 헌신이 약하니까  자녀를 끔찍히 사랑하고 교육을 끔찍히 사랑하는 한국인들에게 교육환경을 생지옥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흩어져서 제일먼저 하는 것은 교회들을 세우는 일이며, 사도행전 11장의 케이스처럼 처음에는 복음을 유대인에게만 전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헬라인에도 복음을 전했듯이, 한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던 이민 교회들이 세계 선교의 중심세력이 될 것이다.  선교사들의 수고와 헌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까지 선교의 큰 폭은 사실 선교사들보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선교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엇을 더 원하시겠는가?  교회의 자발적 선교이다.

8/03/10

더 위대한 일은 남아있다.

눅5:1-11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고기로 배가 가득차는 만선을 경험한다. 그도 놀라고 그의 동료들도 놀랐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보다 더 놀랄 일, 즉 '네가 후에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하신다. 만선의 체험보다 더 놀라운 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고기로 만선을 경험하는 것 보다 더 위대하고 더 의미있는 일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이제까지 내가 주님을 경험한 것보다 더 위대한 일들을 남겨두셨다. 할렐루야!!

8/02/10

주님의 방법은 사람

막1:14-20 주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다. 지금도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방법은 사람. 거창한 행사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닌 사람이었다. 주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주님의 방법은 사람

막1:14-20 주님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제자들을 부르시다. 지금도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방법은 사람. 거창한 행사나 조직이나 프로그램이 아닌 사람이었다. 주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