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요나의 모습이 불편한 것은 바다 한 가운데서 기적적인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그가 보이는 실망스러운 모습만은 아니다. 요나의 모습에서 우리의 얼굴을 보기 때문이다.
요나는 이것은 옳지 않다 생각했다. 우리는 니느웨를 둘러싼 정확한 역사적 정황은 모른다. 다만 요나는 차라리 자기를 죽여달라고할만큼 니느웨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컸다. 그것이 그가 도망한 이유이기도 했다.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2절)
고대전쟁에서는 매우 잔인한 살륙이 이루어지곤했다. 아마도 요나는 그 목격자나 피해자인지 모른다. 이런 악인들을 그냥 용서해주시는 것은 옳지 않다 여겼다. 때로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도저히 용서되서는 안되는 사람이 용서받고 인격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의 교회는 날로 성장하고 사업은 번창한다. 우리는 이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요나처럼 화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가 감당이 안되어 탕자의 형처럼 심통을 부리고 요나처럼 골이 난다. 요나서 4장에서 "이것이 엃으냐?"라는 말이 강조된다. 우리의 심통 뒤엔 편협한 우리의 정의가 숨어있다. 요나의 정의는 결국 그를 그 성의 동쪽으로 가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재앙이 혹 내리지 않을까 바라는 마음으로 거기서 그 성을 바라본다.
그의 정의는 결국 니느웨의 재앙을 바라는 정의가 되고 말았다. 우리가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들이 오히려 잘되면 우리는 그 일이 안되기를 바란다. 정의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고 저주를 바라고 가슴을 황폐하게 만든다. 우리 사회의 이념 대립 속에서, 가치관의 충돌 속에서 종종 살벌한 정의를 만난다.
요나에게 옳지 않다 여겨진 것이 하나님에겐 옳은 일이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의 기준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옳다 하신 일을 우리가 그르다 할 수 없다. 정의가 하나님의 자비를 만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